[Opinion] 니체에 대한 반박 _ 언어, 진리를 말하다

저명한 철학자의 절대적 명성에의 도전
글 입력 2018.01.21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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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저명한 철학가,
니체의 주장에 대해 반박합니다.

글의 문체는,
김소월의 <시혼>의 그것을 빌려옵니다.


 수많은 책들이 ‘A란 무엇인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돈부터 삶까지, 정의부터 죽음까지. 인간은 많은 것에 궁금증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진리’입니다. 무언가를 틀림이 없이 설명하고, 확실하게 정리한 ‘정의’를 인간은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달고 가장 정확한 정의, 진리를 묻는 책들이 가득 찬 도서관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토록 알고 싶어 하는 진리란 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앞으로의 글에서 정리하려 합니다. 또한 필자의 생각은 니체의 그것과는 많이 다름을 알려둡니다.



니체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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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는 언어와 진리를 구분 짓습니다. 언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리를 말한다고 하는 문장들도 모두 주관적 해석에 불과할 뿐이며, 정작 우리는 진리에 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진짜는 없고 허상만 있을뿐”이라는 명문입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는 관점적으로만 진리를 파악할 뿐 정작 진리라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대상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진리는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언어의 주관성의 예시로, ‘돌이 단단하다’ 라는 문장을 들고 있습니다. 돌을 표현하는 ‘단단하다’라는 언어는 돌 그 자체를 표현하는 듯하지만, 사람의 주관성이 포함되어 주관적이고 관점적으로만 대상을 이야기할 뿐이라는 설명입니다.

 진리에 닿을 수 없다는 말은, 진리의 접근성 때문에 나온 섣부른 확신이 아닌가 합니다. 진리가 설명하는 대상이 이 곳에 있는데, 진리는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 어딘가에 있다니요. 알기 힘들다는 이유로 니체는, 진리를 위대함이라는 포장지에 꽁꽁 싸매 저 먼 곳으로 던져버린 것 같습니다. ‘진짜’는 언제나 이곳에 존재해왔으며, 언어는 언제나 그것에 닿으려 노력해왔습니다.



첫번째 반박, 예시의 비균형성


 그는 ‘언어 자체는 분명한 수사학적 기술들의 결과’라 했습니다. 언어는 수사적입니다. 하지만 나아가 언어를 주관적이기만 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필자는 먼저, 니체의 예시문장을 비판하고 싶습니다. ‘돌이 단단하다’라는 문장의 서술어가, 고의적으로 주관성을 앞세운 단어로 선택되지는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단단하다와 같은 형용사는, 다른 단어 종류보다도 주관의 개입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는 단어류입니다. 아름답다, 귀엽다 등이 그러합니다. 언어의 주관성을 예로 들기 위해 선택된 문장에 형용사가 포함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생물은 자란다’ 라는 문장 속의 서술어는 어떠합니까. 눈에 보이는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인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언어는 분명, 그 속에 객관성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를 수사학적인 무언가, 주관적이기만 한 것으로 폄하하는 니체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니체는 독일의 언어에 성이 3개나 존재함을 들며, 각각의 나라마다의 언어가 다른 것처럼 언어는 관점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주장합니다. 물론 언어마다의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들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한국은 파란 것을 보고 파란색이라 말하고, 영미문화권은 blue, 일본은 あお, 독일은 blau라 이릅니다. 어떠한 언어권이던지, 똑같이 파란색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언어는 또다시, 객관적입니다. 전 인류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하고 때문입니다. 니체가 언급한 문법 등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두번째 반박, 진리는 언어를 통해 왔다.


 지금까지의 진리는 언어로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인간에게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도구가 ‘언어’뿐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니체는 진리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닌 음악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그 유명한 디오니소스가 등장하고 이는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것은 다른 이야기겠지요. 필자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사고하는 것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 입니까. 언어입니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느낍니다. 모든 발견과 정의는 몇 개의 음표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대상은 사과였고, 사과는 ‘떨어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었고, 이것 또한 언어를 통한 정의였습니다. 이렇게 참된 정의, 진리는 언어를 통해왔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김춘수, 「꽃」 부분 


 위의 시 구절처럼, 언어는 하나의 대상에 알맞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이고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대상의 빛깔과 향기를 모두 담아낸 언어가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은, 추상적인 대상에 더 정확한 언어를 연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가 곧 언어이며, 언어가 곧 진리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먼저 인간을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로 정의하였다고 가정합시다. 하지만 이 정의가 인간의 모든 특성을 아우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등으로 정의하였을 때, 이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음과 동시에 사유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이야기하기에 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언어는 보다 진리에 나아갑니다. 객관적 언어를 사용하여, 대상의 본질에 정확히 맞닿은 정의, 그것이 진리입니다.

 정의가 물론 관점적일 수 있습니다. 언어는 개인에 의해 발설되며, 정의를 생각해 내는 것 또한 1차적으로는 하나의 개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헤겔은 ‘생각하는 갈대’로 이야기 합니다. 대상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근거하여, 다양한 관점의 정의를 모두 포괄하는 진리를 만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관점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재료는 관점적이지만 다양한 관점을 모두 포괄하기에, 결과적으로 만들어 진 진리는 ‘보편타당’한 것입니다. 다양한 관점, 다양한 단어를 통해 존재는 보다 더 완벽히 드러날 것이며, 관점적 언어들을 참고하여 객관적인 단어로 본질에 맞닿는 것이 바로 진리 추구의 과제인 것입니다.



세번째 반박, '시적 언어'


 그렇다면 무엇이 보다 진리에 맞닿은 언어인가하면 ‘시적언어’라 생각합니다. 진리가 이성보다는 예술적 직관의 범위에 있다는 생각은 니체와 같습니다. 시적 언어를 접하였을 때, 우리는 보다 더 본질에 맞닿은 느낌을 받습니다. 'A가 파랗다‘라는 문장보다, ’A의 색은 맑은 하늘과도 같다‘가 더 진실, 진짜에 가깝습니다. 그 구체적 예시로, 김종삼의 ’나의 본적‘을 듭니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김종삼, 「나의 본적」 부분


 위의 구절을 통해, 우리는 본적이 고요함과, 교회당같은 성스러움, 모퉁이의 어두움과 닿아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시적 언어에서 보통 마음 울림을 느끼는데, 이는 언어가 진실에 닿았을 때의 그것입니다. 언어는 진리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언어도 본질에 닿을 수 있으며, 진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적 언어는 언어 중에서도, 보다 더 진리의 무언가에 가까운 언어라 할 수 있겠지요. 진실, 진짜에 더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언어는 진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니체의 주장과 같이 언어가 주관적이고 관점적인 해석의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객관성을 기반으로 진리에 맞닿고 그것과 동일시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언어의 필연적인 관점적 특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을 차용하여 그를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정의를 만들어야겠지요. 보편타당한 진리는 불가능 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언어들 중에서도,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것은 진실에 맞닿은 ‘시적언어’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소견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으며 글을 마칩니다.



◇ 참고문헌
임건태, 「니체- 언어와 세계 그리고 진리」, 『니체연구 25권』, 2014


[손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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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ladyJ
    • 안녕하세요. 11기 에디터 주유신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제가 배움이 짧아 무지하여 에디터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 댓글 남깁니다.
      '객관성'이라는 것은 합의되는 것인가요? 적어도 우리의 주관으로는 그것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니 언어를 통해 합의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진리 역시 합의의 영역 아닐까요?
      그렇다면 진리 또한 결국 사람의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지각이, 주관이 언어로 묘사되고 공유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진리의 존재를 보증할 수 있는걸까요?
      만약 '본질'이나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을 공유 가능한 언어로 최대한 적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라 해도, 우리는 언제나 진리에 근접해질 뿐이지 진리 그 자체에 닿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언젠가 모두의 관점을 포용하는 '진리'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주관이 개입된 언어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합의의 산물로써 '존재한다'고 보는 이상 누군가의 관점을 억압하는 위험이 도사리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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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점지기
    • 일단 인용하신 김춘수 <꽃>의 구절이 도리어 필자가 펼친 논증에 대한 반증으로 보여집니다. 이름이 없는 객체(자연물)에 이름을 붙인 행위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인 행동 아닌가요? "객관적 언어를 사용하여 대상의 본질에 정확히 맞닿은 정의가 진리"라고 주장하셨는데, 역사적으로 모든 언어와 언어 사용은 특정 시대와 환경, 사용 주체에 따라 함의와 정의가 달라집니다. "객관적"일 수 없다는 거죠. 과거에는 아무렇지 않게 쓰였어도 오늘날은 상황에 따라 조심해야 할 단어들도 상당히 많죠. 아니면 의미 자체가 달라졌거나 정의가 틀린 것으로 간주되어 용어를 대체한 경우도 많습니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적 측면에서도 그렇구요. 이런 예들은 무수히 많고, 따라서 언어로 절대적 진리를 표현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예컨대 동일한 사건이지만 '민란'이란 단어는 지배층의 시각만 담겼다고 해서 '저항'이나 '봉기' 등의 용어로 대체해서 사용하는 사례 등이 있죠. 해석과 관점에 따라 언어는 다르게 사용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단어가 얼마나 그 시대에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느냐죠.

      이렇게 어느 시점에만 '보편타당'했던 것을 절대적 진리라고 볼 수 있을까요?  "시적 언어에서 마음 울림을 느낀다" 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럴까요. 울림은 무얼 뜻하나요? 울림의 정도는 어떻게 측정하죠? 그 울림이란걸 느껴도 수용자에 따라 다릅니다. 누군가에겐 보잘 것 없는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겐 깊은 감동일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동일한 울림을 느끼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도 방식도 다릅니다.  A가 "<꽃>이라는 시는 감동적이야" 라고 했을 때 A한테는 진리일 수 있겠지만 B한테는 아무 감흥없는 고루한 시일수도 있습니다. 그럼 더이상 절대적 진리라고 볼 수 없죠. 애당초 '절대적 진리'가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체에 따라 인식은 달라집니다. 상태와 정도도 다르고. 예를 드신 '파란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글쓴이의 말과 달리 색깔이야말로 상당히 추상적인 영역입니다. 동일한 색을 봐도 누군가에겐 어둡기도, 밝을수도 있습니다. 이미 실험을 통해 색상 또한 문화권과 언어에 따라 인지 정도가 다르다고 밝혀졌습니다. 색깔 뿐 아니라 온갖 영역이 문화에 사람에 따라 전부 다릅니다. 당장 외국 영화, 음악, 책 등을 번역할 때 어려운 거고요. 다른 문화권의 정서를 우리의 언어로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거칠지만 철학의 발전사를 살펴보면 되려 절대적 진리가 없음을 확인하는 쪽으로 흘러왔습니다. 보통 절대적 진리는 중세 신학에서 종교적 관점으로 강조하는 개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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