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한국 문화의 박력, 오셀로와 이아고

글 입력 2018.01.2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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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한국 문화의 박력
오셀로와 이아고



1. 서구화된 문화공간에서 재현된 한국문화의 박력

 현대 사회에서 근대화는 서구화를 의미했다. 촘촘하게 쌓아 올려진 빌딩 사이에 이 땅의 역사는 없었다. 점심보다 브런치, 곰인형보다 테디베어가 더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적인' 것은 '고루한 것'과 같았다. 처음 연극의 설명을 봤을 때 든 감상도 비슷했다. 고백하자면, 극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현대사회에서 탈춤을 극장으로 끌고 온다는 것 자체가 대중성의 포기로 느껴졌다. 실상은 달랐다. <오셀로와 이아고>는 셰익스피어라는 가장 서구적인 주제를 가지고 가장 한국적으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과거 문화에만 멈춰 선 것도 아니다, 사실 당장 연극이 가장 서구화된 문화공간인 극장에서 진행되지 않던가? 필자는 지금까지 탈춤을 본 것이 한국 민속촌의 현장학습뿐이었던지라, 탈춤 자체가 흥미롭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극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다분히 한국적이었음에도, 흥미롭고 대중적이었다.

 <오셀로와 이아고>는 작년 11월에 공연된 창작집단 몬스터의 연극 <맥베스>와 노선을 달리한다. 두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현대로 끌고 와 재해석 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만, <오셀로와 이아고>는 적극적으로 국악과 탈춤의 요소를 빌려옴으로써 흡수되어 이미 소화 당했다고 생각한 국내 문화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무대 세팅은 아주 단조로웠다. 가면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와 모랫바닥이 이 탈춤극의 전부였다. 모랫바닥은 탈춤을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탈춤의 현장성을 재현하기 위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관객들은 단촐한 세팅으로 어두운 커튼 앞에서 모래가 튀는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배우의 작은 움직임이 왜 탈'춤'이 될 수 있는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 음악그룹 나무의 박력있는 연주는 극의 몰입도의 높이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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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면극으로써의 탈춤

 '마음을 숨기는 탈을 써라'라는 부제목에 맞게, <오셀로와 이아고>에는 흥미로운 연출로 가득하다. 연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아고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이 탈춤의 이야기가 <오셀로>가 아닌 <오셀로와 이아고>이어야 할 필요도 극의 중심에 이아고가 있기 때문이다. 이아고는 주변 인물들의 가면을 변화시킨다. 그는 혼자 대사를 가지고 떠도는 유일한 존재다. 탈춤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사'가 아닌 '움직임'임을 생각할 때 그의 말은 움직임보다 얄팍하고 가볍다. 반대로 오셀로와 데스데모나가 대사 없이 격렬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부분은 진정성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솜털과 같이 가벼운 그의 말에 오셀로는 자신의 가면을 떨구고 흰 가면을 뒤집어쓴다. 오셀로가 바꿔 쓴 가면은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가면에 립스틱을 바르는 것과 대비된다.

 인간은 모두 가면을 쓰고 산다. 오셀로가 이아고의 말에 자신의 가면을 맥없이 떨어뜨렸던 것처럼 인간은 가면이라는 보호막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지만 그 가면의 모습은 얼마든지 '자아'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오셀로가 처음에 쓰고 있었던 위엄있는 가면이 그렇고,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춤추던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와 격렬한(혹은 원초적인) 춤을 추고 나서 자신의 가면에 립스틱을 그린 것이 그렇다. 별 개성 없었던 데스데모나의 가면에 빨간 립스틱이 그리는 행위는 매우 특별하다. 그녀는 오셀로의 사랑 아래에서 입을 가질 수 있었다.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입을 가지게 된 것은 상징적이다. 그녀는 입을 가짐으로써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하게 된 오셀로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아고는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보며 통곡하는 것을 보면서 춤을 추고 가면을 벗는다. 이아고 안의 진실한 악의가 관객들에게 비치면서, 이아고의 승리와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비극은 뚜렷한 색채로 다가온다.

*

 가끔 예술 작품을 보고 글을 쓸 때마다, 언어의 한계에 부닥칠 때가 있다. 지금 필자가 써 내려가고 있는 <오셀로와 이아고>가 그렇다. 극장은 늘어나고 있지만, 국악과 탈춤을 오롯이 위한 공연장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세상에서 <오셀로와 이아고>는 국악과 탈춤이 가진 파워를 입증한 훌륭한 실험이자, 부활이었다. 당장 필자부터가 국내 문화에 관심을 끌게 되었으니, 연극이 가진 의도는 훌륭히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국내에 이런 실험이 확대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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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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