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꽃밭 안은 곧 꽃밭 밖일지니 : 연극 < 누구의 꽃밭 > [연극]

글 입력 2018.01.26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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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아포칼립스, 문명이 없는 자리


뉴스테이지 선정작으로 무대에 오른 <누구의 꽃밭>은 ‘신진’이라는 수사에 걸맞게, 도전적인 상상력을 펼쳐낸다. 배경은 어느 시점의 대한민국, 전시상황이다. 잠재적 전쟁 위험을 안고 있는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전시 상황을 펼쳐낸다니! 무거운 상상력으로 점철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웬걸, 공습이나 기관총, 다친 군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도리어 날카로운 펜촉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전쟁 속 인간의 욕망, 생존과 젠더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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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꽃밭>이 그려내는 대한민국은 포스트-아포칼립스의 세계다.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류가 멸망한 것도 아니고, 역병이 도는 것도 아니다. 늘 우리가 우려하고 있는 한국의 전시 상황일 뿐이다. 그러나 <누구의 꽃밭>이 펼쳐내는 세계는 욕망이 이성을 잠식하는 ‘비문명’의 세계다. 눈 뜨고 보기 더러운 욕망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제 몸짓을 키워가고, 이성이니, 정의니 하는 거창한 담론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재기발랄한 오브제 역시 같은 맥락의 장치다. <누구의 꽃밭>이 그려내는 포스트-아포칼립스 한국은, 생필품이 문명의 잔해를 대체한다. 꽃밭 안에선 옥수수 대신 뽁뽁이를 먹고, 칼 대신 케첩을 휘두르며, 화장품 대신 고추장과 마요네즈를 바른다. 오브제의 활용은 문명이 사라진 시대를 드러내는 신선한 접근이었지만, 오브제의 지나친 활용이 되려 극의 긴장감을 저해하진 않았는가, 되짚음은 필요하다.
 
 
 
WELCOME! 꽃밭 밖으로


공연장에 들어서면 빨간색 러그가 ‘WELCOME’이라며, 꽃밭에 들어서는 관객을 환영한다. 꽃밭 안은 네 공간 -재중의 공간, 주정의 공간, 선애의 공간, 식탁-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 집, 어딘가 이상하다. 재중이 딸랑거리는 종소리(남근의 오브제)를 내며, 집을 한 바퀴를 돌면, 선애가 일어나 주정의 약을 챙겨주고, 두 여자는 함께 뽁뽁이 옥수수를 먹는다. 재중과 주정을 칭하는 선애의 호칭을 듣고있자면, 재중과 주정이 부부임을 알 수 있다. 기이함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식사 도중, 주정이 선애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재중은 주정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선애를 성적으로 유린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 문제적인 관계가 집의 균형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징집을 당해 최전방 총알받이로 배치되고, 여자는 밖에 돌아다니다 강간당한 시체로 발견되는 끔찍한 상황에서, 재중의 꽃밭 안은 적어도 생존할 수 있는 안온한 곳이다.

선애와 주정이 재중의 욕망을 채워주고 폭력을 용인하던 아슬아슬한 균형 상태는, 영민의 개입으로 깨진다. 생존하기 위해 꽃밭 안으로 들어온 여장남자 영민은 모든 판을 뒤바꾸고, WELCOME! 새로운 욕망은 생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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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집을 피하기 위해 여장을 하고 다녔던 영민은, 꽃밭 안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욕망의 표적이 된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재중에겐 새로운 성적 대상으로, 주정에겐 잃어버린 아들의 대체재로, 선애에겐 성적 대상이자 희망의 매개물로. 세 인물은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을 영민을 통해 충족시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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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 안에서 안전을 도모하려던 영민은 도리어 꽃밭 밖에 갇힌 모양새가 되고 만다. 꽃밭 밖이나, 안이나, 안전한 곳은 없다. 자칫하다간 욕망의 표적이 될지니, 살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걸음을 늦추며, 몸을 감춰야 하는 것은 똑같다. 영민은 자신을 아들로 원하는 주정과 남자로 원하는 선애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재중에게 정체를 들켜 두꺼운 쇠줄로 식탁 바닥에 묶이게 된다. 군림하는 남성(재중)과 성적 폭력의 연쇄 고리에 있는 여성(주정과 선애), 그리고 '아버지'의 군림 하에 묶인 남성(영민)의 모습은 꽃밭 밖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여기, 꽃밭 안과 저기, 꽃밭 밖은 기실 똑같다.
 
 
 
누구의 꽃밭?

 
폭력의 연쇄는 재중이 군대에 ‘양귀비’를 공급하면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보아하니, 재중 역시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며 살아남은 것이 아닌가. <누구의 꽃밭>이 그리는 포스트-아포칼립스의 한국은 문명의 빈 자리에 욕망이 들어서서는, 생존하기 위해 남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는 연쇄를 보여준다. 폭력의 연쇄는 다른 말로, 욕망의 연쇄인 것이다.

그러나 꽃밭의 양귀비가 사라지고, 패전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개소리(라디오)와 함께, 폭력의 연쇄 역시 끊긴다. 재미있는 건 패배를 알리는 지도자의 행색이다. 위엄 없는 우스꽝스러운 어조와 반바지 차림, 잔뜩 당겨 신은 긴 양말은 기존의 남성 질서가 모두 무너진 패전의 상황을 역설한다. 욕망의 연쇄 속에서, 여성을 강간하고(혹은 방관하고), 안온을 빌미로 선애와 주정을 집 안에 가둬두었던 남성 질서는 곧 국가의 질서이자 재중의 질서다. (그러나 전쟁은 남성 질서를 온전하게 보존해주지 못한다. 재중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거세해야 했으며, 영민은 남성성을 숨기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패전 후, 재중은 꽃밭 안에서 자살하고, 영민은 꼼짝없이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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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애와 주정은 폭력의 연쇄 속에서 빠져나온다. 선애는 꽃밭을 빠져나오고, 주정은 집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꽃밭 밖이, 그리고 꽃밭 안이 선애와 주정의 생존을 보장해주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희생을 강요했던 재래의 남성권위가 몰락한 자리엔, 여성의 실존적 선택만이 남았다. 문명이 사라진 안과밖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꽃밭 안과밖에 묶여있던 것은 탈주한다. 그러나 이 탈주가 통쾌함을 주진 않는다. 모든 욕망의 표적이 되었던 영민은 집에 갇혀 울부짖으며, 탈출한 선애와 소파 위 주정의 얼굴엔 허망함이 스친다.

그렇다면, 욕망과 폭력의 꽃밭은,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꽃밭이었을까. 남는 건 어떤 새싹도 남아있지 않은, 폐허가 된 꽃밭뿐이다.

*

신진 창작진이 선보인 <누구의 꽃밭>은 폭력과 젠더, 욕망과 실존의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려는 신선한 펜촉이 돋보인다. 강약 조절이 약해, 메시지가 종종 흩어진다는 인상을 남기지만, 창작진의 다음 작품 역시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WELCOME! 꽃밭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처럼,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우리를 이끌어주길. 펜촉은 늘 날카롭고 신선하길, 꽃밭을 건너며 작은 희망 하나를 안아본다.



공연정보

 

INTRODUCTION


공연일정
2018년 1월 12일 – 1월 20일
(평일 8시 / 토, 일 4시 / 월요일 휴무)

공연장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17세 이상 관람가

전석 30,000원
   

CREATIVE STAFFS


연출 : 설유진
작가 : 이오진
조명 : 신동선
의상 : 강기정
음악 : 박지만
음향/영상 : 목소
기획 : 권영, 설유정
그래픽 : 권영
출연 : 황순미, 황선화, 임영준, 강서희, 서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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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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