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흑역사를 추억으로 치환시켜준 책 [문학]

'글쓰기 좋은 질문 642'
글 입력 2018.01.28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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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한 장난감, 문구류, 온갖 잡화 등을 파는 숍을 몇 달 내내 일주일에 한 번꼴로 구경 가던 때가 있었다. 마침 집 앞에 그런 어마어마한 가게가 생긴 건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널찍한 가게는 전 세계에서 주인장의 취향껏 그러모은 희귀한 아이템들로 가득 차 있었고,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심을 자극하는 곳이었다.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횟수에 비해 구매력은 극히 낮은 편이었는데 가게에선 진상 고객으로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도저히 안 사고는 못 배기겠는 물건을 만나는 날은 종종 계산대로 향했다. 샅샅이 둘러보다 심마니처럼 하나씩 골라낸 안목이 통했는지 그때 구입했던 몇 가지 물건들은 아직까지도 100%의 만족도를 보이고 있다. 가령 이만 원 주고 산 투톤 가죽 필통이라던가, 한정판 재즈 시디라던가...

  그때 책도 한 권 샀다. 주로 입체 그림책이나 여행 관련 도서 몇 가지만 진열되었는데 어느 날 '글쓰기 좋은 질문 642'라는 노란 책이 들어왔다. 글쓰기 좋은 질문이라니. 육백 개나 넘는 질문을 해주다니. 반가움에 냉큼 집어 들었고, 역시나 흠뻑 빠진 나는 삼일쯤 그 가게에 출근 도장을 찍다가 결국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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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심 끝에 집어온 '글쓰기 좋은 질문 642'는 소설가, 영화감독, 작가, 저널리스트, 시인, 비평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35명이 공동 집필한 '글감' 642개를 묶은 책이다. 그 글감을 페이지 위에 2,3개씩 배치하고 하단은 여백으로 놔두어 주제를 보고 떠오르는 글을 쓰게끔 하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글감에 번호는 매겨져있지만 무작위로 지어진 순서라서 처음부터 차례대로 해도 되고, 아무 페이지나 들여다봐도 좋다.

  가장 결정적으로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건 어떤 심리학적인 근거로 642개를 정한 게 아니라, 그냥 이 숫자가 마음에 들었던 편집장의 충동적 선호로 정해졌다는 점이었다. 비록 무논리로 접근했어도 논리적인 척 포장하는 게 보통의 책들인데, 맹랑한 솔직함에 매료되었다.

  글감은 정말 중구난방이다. 어쩔 땐 심오해 보이고, 엄청 참신하다가, 어쩔 땐 진부하기도 하다. 엄청 긴 몇 문장의 질문도 하다가, 매우 짧은 단문을 던지기도 한다. 지금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 속 몇 개를 인용해보자면.


'당신은 시카고에 사는 53세 여자다.
산타클로스에게 편지를 써라'

'고전 동화 하나를 선택한 후,
당신의 고향을 배경으로 한 현대물로 각색하라.'

'내가 훔치고 싶은 것'

'우연히 아버지가
아들의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난 자리에 아들은 없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하다.
이 장면을 써라.'

'과거의 기억 중
인상적이고 중요한 경험을 떠올려라.
동생이 태어난 것, 팔이 부러진 것,
가족과의 자동차 여행, 이혼 등과 같은 것.
이제 그 경험의 배경을 바꿔보라.
그리고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경험을 한 것처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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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박약에 작심삼일의 아이콘인 나는 몇 장 채우다 말 줄 알았다. 그럴까 봐 3일이나 고민했던 거다. 그리고 역시나 끝까지 채우진 못했지만 무려 반이나 채우는 쾌거를 이루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팝콘 같은 글감들은 내겐 굉장히 새로운 충격이었고 한창 공부에만 몰두해야 했던 그 시절의 정서적 환기구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쓰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후벼파는 글도 써볼 수 있었고, 지금 보면 어떻게 떠올렸나 싶게 기발한 글도 썼다.

  레포트나 이런 곳(아트인사이트)에 올리는 공식적인 글들은 온오프라인에 떠돌아도 아무렇지 않지만, 내밀한 글들은 존재조차 삭제해버리는 게 내 오랜 관습이었다. 어릴 적부터 일기장, 다이어리는 한 해만 지나도 문장이 형편없어 보여서 내다 버리느라 내 손에 남은 게 전혀 없었다. 이 책 또한 오직 나만 들여다볼 심산으로 온갖 객기를 다 부려놨던 터라 평소 같았으면 버려지고도 남았을 텐데, 아직 다 채우지 못했다는 책임감 때문에, 그리고 책이라서 차마 버리지 못하다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처음으로 예전 '진짜 나의 글'을 엿볼 수 있는 톡톡한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몇 년 전의 내밀한 글을 보관해주고 있는 유일한 책. 이 책 덕분에 수치스럽고 찢어 버려야만 하는 줄 알았던 과거의 글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옛 문장은 귀엽고, 참신하고, 생각보다 진중하다. 한참 영어 공부를 많이 하던 때라 번역체가 간간이 묻어나던 시기적 특징까지 반갑기만 하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대학 친구 중에 초등학생 시절 썼던 수십 권의 일기장을 아직도 간직하는 나와 정반대의 캐릭터가 있었다. 난 부끄러워하며 찢어버린 그 물건을 친구는 으캬캬캬- 특유의 해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줬다. 유난히 창피하고 우스운 날의 일기는 몸소 읽어주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흑역사'를 '추억'으로 치환하는 그 당당함이 생경하고도 부러웠다.

  그 친구 이후로 막상 터놓으면 별거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면서도 내 다이어리 분서갱유는 매년 시행되었다. 그 지독한 적폐는 이 책을 이후로 완전히 청산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미국인인 편집장과 35인의 예술가들, 그리고 신기한 잡화점을 운영해준 사장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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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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