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육체의 아름다움에 관한 소고 [문화전반]

글 입력 2018.01.29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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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육체의 아름다움에 관한 소고



1. 여린 마음 동호회 우수회원, 손진주입니다.

 내 가슴 가장 안쪽에 숨겨둔 말이 하나 있다. 나를 포함해 누군가가 마음이 아려올 때는 꼭 확인해보곤 한다. 마음에 긁힌 상처는 신체에 난 상처와 같아서, 길고 깊게 난 상처는 아물어가면서 천천히 지워질 뿐,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흉터를 바라보는 건 아프고,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처는 쉽게 벌어진다. 우리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심장의 곳곳에 숨겨놓고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간혹 내 상처가 더 커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벌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꼭꼭 숨겨둔 그 마음을 서로 확인할 수 없으니, 우리는 조금씩 죄를 짓고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냥 사람들을 아예 안 만나고 살면 좋을 텐데, 사람들은 상처를 만들기도 하지만 메우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 촘촘한 철벽과 여린 마음 동호회의 우수회원인 나는 그 과정을 이해한다. 당장 심리학부터가 상처 주기가 싫어서,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기 위해서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던가. 내가 정말 좋은 심리학자가 될 수 있냐를 떠나서, 나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이해한다. 모두가 사랑을 꿈꾼다. 아닌척해도, 다양한 형태로 조금씩 바란다. 우리의 목표는 결국 다른 존재와의 합체를 향해 있다. 짧은 인생을 산 사람으로서 생각하건대, 인간의 삶은 색채와 같다. 수많은 이상과 가치로 다양한 인상을 뿜을 수 있지만, 다양하고 넓은 스펙트럼에는 모두 '빛'이 있지 않은가. 사랑은 빛이다. 우리는 공감 능력을 갖췄고, 갓난쟁이일때부터 애착을 갈구했다. 이미 그렇게 태어나버린 것을 어쩌란 말인가.

 오늘 나는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정확히는 사랑의 주체인 육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육체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선 나도 가장 안쪽에 있는 상처를 드러내야 한다. 나는 언젠가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라는 다큐멘터리를 소개한바 있다. 그 다큐멘터리가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내가 사랑과 육체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과 다양성의 대두로 '육체'는 더 심도 있는 이야기가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과 관련된 주제에서 우리는 상처와 욕망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된다.



2. 공주님 싫습니다. 왕자님 시켜주세요.

 나는 가난한 동네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옛날에도 웃는 걸 잘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쉽게 웃을 정도로 단순했거나 감정 표현의 스펙트럼이 조금 좁았던 것 같다. 기억의 조각 조각을 이어보면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려고 노력한 것 같기도 하다. 아픈 기억 때문에 그 당시의 나를 미화시킬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런 취급을 받을 만큼 나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여튼 파리나무십자가를 너무 사랑하신 어머니는 내가 유럽 공주님 그런 것으로 생각하셨고, 나는 드레스 같은 옷을 잘 입고 다녔다. 그리고 그게 집단 따돌림의 계기가 되었다. 이름이 같은 친구가 '공주 같다'는 이유로 나를 괴롭혔다. 치마를 입고 다니면 친구들이 모두 비웃었다. 그때부터 공주님은 나한테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당시에 봤던 콘텐츠들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긴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은 주체라기보다는 객체에 가까웠고, 어쩌면 나는 거기서 나를 발견했다. 맨날 일방적으로 당하고, 탑에 갇혀서 우는 공주님들은 나한테 불쾌한 느낌을 줬다.

 그 후로도 나는 꽤 오래 불운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여자다워지는 건 늘 나한테 패배를 의미했다. 사실 그렇게 남성적인 성격이 아닌데도, 일부러 목을 거칠게 쓰고 거침없는 척 했다. 강한척해도 내가 여린 마음 동호회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서 상처도 많이 받았는데, '여성'적으로 보이기도 싫고, 치마는 입기 싫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외모지상주의'나 '젠더' 측면에서 내 생각을 이해하려 했다. 남들은 흔히 있다는 남자친구도, 성에 관한 관념도 싫었다. 애당초 '남자' '여자' 나눠서 내가 '여자'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사랑받기 위해서 나를 변화시킨다는 개념도 싫었다. 그 개념에 갇히고 나서 나는 옛날처럼 눈물을 삼키고 실실 웃기만 하는 멍청이로 남을 것 같았다. 대학을 다니면서 내 머리는 늘 짧았다. 두꺼운 안경은 어쩌면 나의 자존심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옛날에 그린 만화를 첨부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짧은 만화를 첨부해도 될까, 나는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이게 일기같은 만화임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욕설은 스리슬쩍 지워 놨으니, 나의 바보 같은 발언에는 관대함을 가져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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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직도 어려운 '아름다움'

 저 만화를 그린 지 1년 후, 나는 실제로 살을 20kg에 가깝게 뺐다. 여성스럽게 변했고, 그게 계기가 된 건지 남자친구도 생겼다. 남동생이 슬쩍 외모지상주의에 굴복했냐고 물어보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세모라고 말해줄 것 같다. 왜냐면 나는 이제 정말로 아름다워지길 바라고, 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이 발견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만화를 그리면서 느낀 생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나는 '나'의 육체가 사랑받길 바랐다. 사회적 아름다움에 맞고 틀리고, 연애를 시작할 수 있고 말고를 떠나서, 나도 사랑받을만한 육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나는 '사랑스러움'을 '아름다움'과 동격에 둔다. '사랑스러움'에 답이 없는 것처럼 '아름다움'에도 답이 없다. 뻔한 이야기지만 오랜 시간 내가 고민한 결과다. 이 고민을 위해 애당초 사회적 기준에 맞출 필요는 없었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말랑말랑하게 약한 부분이기도 하고, 나도 그 속에서 치열한 고민을 했던 사람이기에 오늘은 그래도 '미의 기준'에 아주 쬐금 가까워진 입장에서 느낀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내가 실제로 더 예뻐졌다고 주장하거나," 예뻐져서 행복해졌으니 우리 모두 행복해봅시당!"을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사랑받길 바라는'ㅡ 그래서 '아름답길 바라는' 그 자체를 긍정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아름답길 바란다. 사랑받길 바라니까 당연한 거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을만한 모습을 취하길 바란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말로 우리가 아름다워지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나는 지금까지 그 고리 때문에 '나다운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웠다.

 평가가 당연시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누군가를 쉽게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 대상이 아직도 사회적으로 '아름다움'을 강요받는 여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사실 때문에 소위 '여성스러워지는 것'이 권력 구조에 의한 복종처럼 느껴질 수 있다. 물론 사회적인 폭력은 존재하고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우리가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나는 무책임하게 "세상의 모든 남녀가 똑같이 예뻐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만 맞다. 지금까지 나는 '아름다움'에 답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아름다움'의 모범적인 형태는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남녀를 잘 그려낼 수 있다. 구질구질한 이야기지만 진화심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우리의 원시 DNA가 그렇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분명 형태의 아름다움에만 집착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육체가 주는 인상만을 남기기로 했다. 옛날과 지금 중 '아름다운 육체'를 이해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비만이건, 성별이건, 우리는 외모지상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그 육체만이 주는 아름다움 자체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비만인의 몸에서 가장 얇은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아름다움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역사의 흔적이다. 누군가가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 육체는 사랑받기 위해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의 흔적이 된다. 뚱뚱한 사람이 섹시한 옷을 입건, 소년 같은 소녀가 머리카락을 자르건, 노인이 파란색 머리로 염색을 하건, 모두의 마음에는 한결같은 목표가 있는데 표현은 다르다. 사랑받으려는 모든 행동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단번에 찾지 못해도, 우리는 금방 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그 수많은 역사가 특별한 것처럼 그들의 모습도 특별할 수밖에 없다. 비만인 댄스 공연도 Nothing to lose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긍정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서,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아름다움과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본능이고,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와 당신은 아름답다. 우리는 서로를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억만 번이고 불러줄 수 있다. 우리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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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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