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대지'와 상하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2) [여행]

글 입력 2018.01.3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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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여러 도시들을 여행해보고 느낀 것은, 도시의 크기나 GDP 등등의 성장지표가 그 도시의 지하철 시설 수준과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나 홍콩의 지하철이 가장 깨끗하고, 편리하며, 널찍했다. 세계적 수준의 도시인 뉴욕이나 런던의 지하철은 그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다. 뉴욕의 지하철은 (2013년 당시) 스크린도어도 없는데다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조차 제대로 안 해줬고, 런던은 덩치 큰 성인 남자 두 명만 일렬로 서도 꽉 찰 만큼의 작은 전철이 100년 넘게 달리고 있다. 잦은 고장과 시설 점검으로 인한 연착은 기본이다.

그에 비해 늦은 산업 혁명과 경제 성장을 경험한 아시아의 도시들(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의 지하철은 매우 쾌적한 편이다. 상하이의 지하철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대신 중국답게 규모가 큰 역들이 많아, 환승 안내 등의 표지판이 꽤 친절하게 많이 붙어있었다. 여담이지만, 상하이는 지하철에 들어갈 때마다(!) 보안관들이 막아서서 짐 검사를 한다. 처음에는 보안관들이 하라는 대로 몇 번이고 가방을 보안대 위에 올렸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도 보안대를 그냥 유유히 지나가기도 했다.



    

티엔즈팡,
빛바랜 골목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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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아무튼, 상하이의 지하철을 타고 다푸차오(Dapuqiao)역에서 내리면 타이캉루라는 지역에 들어서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서민들이 거주하는 밀집촌에 불과했다고 한다. 근대의 경제개발 아래에서 다른 많은 밀집촌들이 그랬듯 이 지역 역시 모두 철거되고 다른 빌딩이 들어설 법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이곳은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타이캉루 안의 티엔즈팡이라는 작은 골목은 입구를 찾기도 쉽지 않은 곳이지만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예술인들이 하나 둘 모여 차린 갤러리나 공방, 아기자기한 소품샵들로 가득한 골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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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티엔즈팡에 들어섰을 때, 이곳을 어떻게 규정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래서였을까? 붉은 벽돌 건물들이 비좁게 모여 있는 사이로 넝쿨식물들이 머리칼을 내리고 있는 수많은 화분들을 보면 언뜻 유럽의 골목에 왔나 싶다가도, 미로처럼 배배 꼬인 길 사이로 흉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허물어져 있기도 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골목 사이로 요즘의 ‘핫플레이스’처럼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찻집과 맥주집이 모여 있는 곳. 상하이에서 이렇게 개성 있는 골목이 또 있을까? 상하이의 화려한 번화가와 스카이라인도 좋지만, 이렇게 자그마한 골목도 그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남겨둔 상하이 정부가 굉장히 현명했다고 느꼈다. 특히 침체되어가는 지역에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상업 활동을 하고, 그곳에 관광객들이 모여 활기를 되찾으면서 예술인과 지역 모두 상생하는 구조가 된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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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또, 골목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것도 좋았다. 오래된 벽과 바닥, 좁은 길을 그대로 둔 채 싱그러운 식물들과 아기자기한 간판,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로 그곳을 채우니 그 멋스러움이 훨씬 살아났다. ‘낡고 더러운 것’을 ‘깔끔하게’ 갈아치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티지함을 강조한 것이다. 18세기 유럽 거리에 있을 법한 영국식 티룸이 티엔즈팡 골목에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그 티룸이 널찍하고 럭셔리한 백화점 안에 있었다면, 아마 그런 분위기는 내지 못했을 것 같다.
 
 

옛 것으로 돌아가는,
예원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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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상하이의 인사동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중국 전통 정원인 ‘예원’을 둘러싼 상가 거리인 예원상장이다. 예원상장 거리로 들어서면, 붉은 빛 목조 건물과 기와, 금빛 장식들로 가득해 중국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 와서야 내가 중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만큼 상하이에서 찾아보기 힘든 옛 중국의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상하이 내 유일한 전통정원이라는 예원도 관광명소이지만, 줄이 너무 길어 우리는 예원상장만 구경하기로 했다. 유명한 ‘남상만두’집에서 딤섬도 먹고, 휴일이라 넘쳐나는 사람들 사이로 중국의 간식이나, 전통 기념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 가옥양식을 따른 건물들 속에 스타벅스나 VR 체험관 같이 얼핏 어울리지 않을 법한 가게들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었다. 오래된 옛 건물의 느낌과 현대적이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공존하는 것이 정말 인사동 같았다. 다만 중국답게 규모와 화려함이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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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이것은 여행을 다녀온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사실 예원상장은 옛 상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아니고 아편전쟁의 폭격으로 망가지고 사라진 상가였던 것을 1990년대에 명·청시기 전통 가옥양식을 따라 새롭게 공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널찍하고 세련된 느낌이 들었구나 하고 이해가 되면서도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왜 옛 모습과 역사를 다시 재현하고 보존하고 싶어 하는 걸까? 전통을 보면서 어떤 매력을 느끼는 걸까? 예원에서 다시 펄 벅의 「대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북방 시골의 농부였던 왕룽에서부터 출발해,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 중 누군가는 장군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누군가는 상인이 되고, 누군가는 미국 유학을 떠나지만 결국 그의 손자들 중 한 명은 다시 농부로 돌아가 땅을 일구는 이야기. 그 책을 다 읽었을 때에도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왜 다시 땅인가. 왜 다시 대지인가.

*참고: 투어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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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변화하는 시대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때론 더욱 특별하다. 티엔즈팡의 낡은 골목, 예원상장 전통거리가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매력을 가진 이유다. 상하이는 고층빌딩의 빛나는 스카이라인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인 도시이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중국의 오랜 역사 덕분에 더욱 강력하고 매력적이다. 상하이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지난 오랜 세월 상하이를 있게 한 것들은 그대로 상하이에 남아 반짝거렸다.
 




우리는 새롭고 신기한 것을 보며 놀라고 즐거워하면서도 동시에 오래되고 낡은 것들에 향수를 품고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마치 중국 격변의 시기를 온몸으로 거친 왕룽 일가가 결국 다시 대지로 돌아오는 것처럼. 시대의 물결에 떠밀려가는 우리가 결국 발붙이고 살아야 할 곳은 바로 이 땅이다. 흉년에 어쩔 수 없이 남으로 떠나야 했던 왕룽이 가졌던 믿음처럼, 대지는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온 우리들을 묵묵한 기다림으로 안정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겐 아직 땅이 남아 있어. 그건 누가 뭐래도 내 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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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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