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술은 쉽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다.'라는 책임감 없는 소리[시각예술]

글 입력 2018.02.05 16:1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미술은 쉽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다.라는 책임감 없는 소리


Art-portrait-collage_2.jpg
 

“미술은 쉽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다”


전공자도 아닌 내가 미술사와 미학에 관심 갖고 아직까지도 미술이라는 것에 매달려 살아가는 이유는 이 무책임한 한 마디 때문이었다.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나에게는 디즈니나 소년만화 속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환상에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tumblr_lz412ce5BK1r2yonh.jpg
 

하지만 ‘누구’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일차적으로는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고, 2차적으로는 ‘누구’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부분의 미술 해석은 어렵다. 검게 칠해진 네모 박스에 우주를 담고, 작은 변기에 이름까지 지어주고서 세상을 담았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하고 해답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누구’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섰다며 박수 쳤겠지만, 자신의 박수 뒤에 따라올 누군가의 박수와 시선에는 무책임하다. 게다가 ‘누구’는 깍쟁이라 쉬워질 생각도 없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작은 선 하나에 감동받는 척 그들의 위선을 지킨다. 그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을 만나고 다니는 어린왕자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세상에 남은 ‘누구’는 얼마나 될지 상상해봤다. 내 환상은 그렇게 깨져버렸다.


cdn.macrumors.comarticle-new201612Instagram-Logo-800x450-05c3444a1922583e90fe382e18c9b8cee0fc27b3.jpg
 

그리고 2018년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미술은 하나의 문화처럼 번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이 됐다. 사람들에게 미술에 대한 취향이 생기고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으며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지속적인 애정을 보낸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 두기도 한다. 미술관의 경우 복합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며, 영화관만큼은 아니지만 미술관에 가는 일 역시 자연스러운 요즘이다.


87eaed80-6af5-4ef6-b24d-d8cc21f5c4e7.jpg
 

미술이 쉬워졌기 때문일까? 현대미술이니 동시대 미술이니 하는 것들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일까?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술은 표현 그 자체다. 소재나 재료는 달라졌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미술은 동일하다. 지금처럼 유행은 있었지만, 유행은 말 그대로 지나가는 유행일 뿐이다. 요컨대 미술은 쉬워진 적도 없고 늘 그 자리에 있었다.

 
15074849166_fe099118b4_b.jpg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찾아야 할까? 그건 사람들의 삶에 있다. 지금 사람들은 걱정하고 고민할 일이 많다. 때문에 미술에 대해 고민할 겨를이 없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미지와 미술은 홍수처럼 불어났다. 언제 어디서든 아름다운 것들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미술은 깊은 고민 없이 즐길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것은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다.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달라진 건 없다. 마치 60년대가 팝 아트의 시대였던 것처럼 지금은 이런 식으로 미술을 ‘소비’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사실 이것은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기있는 전시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미술관은 관람객이 직접 손발을 움직여 경험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 됐고, 엄청난 시간과 기술이 들어간 작품이 아닌 낙서와 공산품이 전시된다. 전시장은 작품만큼이나 공들여 만들고 사람들은 그것에 인스타그램과 해시태그로 화답한다. 즉, 사람들은 보는 것 이상을 원하고 현실과 온라인의 경계를 무너뜨리기를 원한다. 놀랍거나 새로운 일이 아니다. 가령 누군가가 앤디 워홀의 작품을 두고 미국의 문화와 팝아트라는 사조나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들먹이는 것이 과거의 감상법이었다면,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어렵게 설명할 필요 없이 한 단어면 충분하다. “예쁘다”


palyaco-son-aksam-yemegi-750x390.jpg
 

물론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미술의 품격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저게 무슨 미술이냐며 욕할 수 있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두고 ‘저건 미술이 아니야’라며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난 수 없이 많이 봤다. 하지만 그 품격을 누가 만든 것인지, 왜 만든 것인지, 왜 미술에 품격이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누군가’의 그늘에서 빛으로 나아가려 하는 미술의 발목을 잡는 일이다. ‘누구’는 언제까지 과거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지금의 미술은 즐기는 것이다. 미술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미술답다.


[공정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