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03. 그냥, 그만 참으면 안 될까?

글 입력 2018.02.1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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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그냥, 그만 참으면 안 될까?


[쓰다]

1. 혀로 느끼는 맛이 한약이나 소태, 씀바귀의 맛과 같다.
2. 달갑지 않고 싫거나 괴롭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요즘 약들은 먹기 좋게 나온다. '약은 쓰다'라는 말이 이젠 별로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처럼, 정말 먹기 쉽다. 맛을 느끼기도 전에 삼킬 수 있고, 심지어는 맛있는 약까지 있다. 먹기 좋게 향이 달콤하다거나 목구멍으로 넘기기 쉽게 제조되는 것이다. 심지어 초콜릿향이 나는 비타민제도 먹어봤다. 그래서 나는 약이 정말로 '쓰다'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가루약이나 한약은 좀 다르겠지만.) 어른들은 편식을 하거나 건강식품을 잘 챙겨먹지 못하는 ‘나’ 같은 애들에게 ‘쓴맛을 알아야 진짜로 나이가 드는 거다’라고 종종 말씀들 하시는데, 사실 그 말의 의미를 난 잘 모르겠다. 몸이 약한 편이라 온갖 영양제를 먹어봤지만 그 효과도 잘 모르겠고. 어쨌든, ‘쓴맛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 나온 말인지 고민해봤다.


1. 쓴맛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질 만큼
다양하고 건강한 음식들을 경험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네.
나이가 들면 그 맛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니 어서 들게.

2. 인생은 원래 ‘쓰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 투정 말고 먹기나 하세.


  물론 의미가 중의적으로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 전자의 의미라면 그렇구나, 정도로 고개가 끄덕거려지지만 후자라면 글쎄. 심신이 아픈 사람들이 먹는 약도 요즘은 쓴 경우가 거의 없는데, ‘쓴 것’을 받아들일 때 투정부리는 것까지 핀잔을 들어야 하는 걸까. 잔말 말고? 옛날에는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밥상머리에서든 학교에서든 ‘쓴 것’은 주로 해가 되는 것들이 아니고 나에게 득이 되고 덕이 된다고 가르침 받았으니까. 그럴 수 있다. 내게로 와서 ‘덕’이 되고 ‘득’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요즘 내가 다시 생각해보고 있는 지점은 내게로 돌아오는 것들이 아니다. 그 부분이 아니라 바로 이전, ‘덕’이 되고 ‘득’이 되기 이전에, 정말로 아무런 ‘해가 없는 것’인지가 중요해졌다. 그래서, 참아야 한다고?
  
  최근, 나는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약을 먹으며 지내고 있다. 신경안정제와 수면유도제. 약은 그냥 물과 함께 꿀꺽 넘기면 된다. 정말 쉽다. 그리고 최대한 신경을 안정시키려 노력하고, 수면을 유도하려 노력하면 된다. 약을 먹었으니, 불편했던 마음을 진정 시키거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도 어느 정도 쉽다. 그런데 말이지. 마음이 달갑지가 않다. 나는 ‘진짜 쓴맛을 몰라서’, 혹은 ‘못 견뎌서’ 결국 이러고 있나. 그래서 난 ‘덕’이나 ‘득’을 못 얻은 것인가. 근데 모르면 어떻고 못 견디면 어때. 깨닫고 알아내서 끝끝내 버티고 버티면 내가 그냥 ‘조금 더 인내심이 강한 나’가 될 뿐, 그런 정도의 ‘덕’이 생길 뿐, 내 고통이 ‘고통이 아니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면서. 나를 병원으로 이끈 모든 것들을 생각해 봤다. 모든 얼굴들과 말들과 침묵들을.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고통을 겪으면서 제일 덜 아팠던 것이 ‘약 먹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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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 후 부모님 입속으로 들어가는 온갖 영양제와 이름도 모를 무슨무슨 오일, 울금가루 따위의 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편이다. 정말 냄새부터가 쓰고, 상상하고 싶지 않은 맛들의 것들이 종종 있다. ‘몸에 좋다고 생각하면 맛있어?’ 하고 물으면 ‘좋다고 하면 뭔들 못 먹겠니’ 라는 답이 돌아온다. 엄마의 거친 손, 아빠의 뭉친 어깨와 허리를 보고 미안해져서, 결국 눈을 떨군다. ‘좋다, 라는 거 말고 행복하다, 라는 걸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될까?’ 라고는 더 말하지 못했고. 좋은 거 말고, 행복해지는 거. 사노요코의 책 중에 <이것 좋아, 저것 싫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있다. 얼마나 명확한가. 좋다고들 하니까 좋은 거 말고, 저건 싫고 이건 좋아서 하는 행복한 일들. 다들 사실은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항상 ‘그만 참고, 행복해지면 안 될까?’ 라고는 외치지 못하는 우리.
   
  약을 먹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괴롭다. 그들이 얼른 나았으면 하는 마음과 오랜 시간 그들이 버텨왔을 시간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어쩌면 평생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겠지, 좋아질 수 있다고 믿으면서 뭐든 다 먹을 수도 있겠지’ 라고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사실 우리가 ‘쓴 것’을 굳이 삼키는 이유는 투정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원래 다 좋은 것이고 원래 다 덕이 따르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괴로우니까 ‘사실은 아프고 싶지 않다’고 투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엄마랑 아빠가 온갖 영양제를 챙겨 먹는 것도, 내가 정신과 약을 먹는 것도 ‘무너지고 싶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조용히 요란을 삼키는 거다. 인생이 ‘쓰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부정할 수도 없고. 그러나 잔말 말고 의젓하게만 살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의젓하게만 살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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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서 쓴 것이 아니라, 써서 쓴 것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몇몇의 사람만 알 리가 없다. 엄살 부리기 좋아하는 사람만 알 리가 없다. 써서 쓴 것이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아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적어도, ‘성질날 만큼 쓰다’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나의 약봉지를 바라본다. ‘쓴맛’을 다스리기 위해 제일 덜 ‘쓴’ 것을 먹는 하루하루. 아침과 저녁 끼니에 맞춰 입안으로 훌러덩, 일상에 속속 박힌 내 알약들.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의 투정을 듣고 싶다. 쓴 거 그만 먹고 싶다고 무릎을 찰싹 치며 일어나는 모습들을 보고 싶다. 정말로 행복이 별 건가? 그래서 이렇게 모두가 말없이 그저 삼키고 삼키기만 하는 걸까?

  그냥, 그만 참으면 안 될까?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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