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성과 감성의 문제 [영화]

영화 < 나는 부정한다 >
글 입력 2018.02.16 00:3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3.jpg
  

 내가 나의 키워드에 감성과 이성을 기입한 것에 대해 '감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이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이에 대해 나는 감성이 더 중요하지만, 그 감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성의 힘이 더 강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누군가가 이 답변을 기억해주며 그때의 내 말이 이 영화를 연상시켰다고 전해왔다.

 < 나는 부정한다 >, 원제 < DENIAL >. 법정 영화라고 해서 어려울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그분이 어떤 맥락에서 이 영화가 연상되었다고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부인했던 역사가 데이비드 어빙이 미국의 역사가 데보라 립스타트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던 실화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데보라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을 중점으로 다룬다. 어빙이 건 소송에 대해 대응하는 것 자체가 데보라에게는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을테지만, 데보라는 어빙이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피해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재판을 감행하기로 한다.


14.jpg
  

 그녀를 중심으로 꾸려진 변호인단. 변호인단은 영국에서 벌어지는 재판인 만큼 당국의 법률에 따라 데보라를 승소로 이끌기 위한 전략을 짠다. 데보라는 자신이 직접 증언하기를 바랐으며,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증인으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달리 변호인단은 데보라의 입을 막고 생존자들을 법정에 세워서는 안된다고 설득한다. 그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은 이슈를 혼동할 것이며, 생존자들은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은 기억하지 못할테고, 어빙은 그 점을 파고들어 그들을 조롱할 것이었다. 데보라가 원했던 지점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역사적 고증을 통해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었지만, 데보라가 보기에 변호인단은 오히려 데보라와 희생자들을 뒷전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였음을 보여주었다.

 변호인단 역시 조사를 위해 아우슈비츠를 돌아보며, 그리고 예상 반론을 검토하며 감정적이게 되었을 것이다. 심적 고통을 느꼈을 것이고,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례하고 비정하게 보이더라도' 객관적이어야만 했고 이를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었다. 감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성의 힘이 더 강해야한다는 말에 이 영화를 떠올리셨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6.jpg
 
7.jpg


"하지만 최선으로 느껴지는 게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낳진 않아요. 하지만 마음은 편하죠. 악마를 노려보면서 감정을 쏟아내면 마음도 편하고 만족스러울 거에요. 그리고 패배를 각오해야 하죠.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영원한 패배.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입을 닫고 이기세요."





 감성을 보호하는 이성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전공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공에서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 단어들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유난히 오피니언에서 나의 동아리 이야기를 많이 언급하게 되는 것 같지만, 이번에도 불가피할 것 같다.

 예전에 동아리에서 여자 재학생에 대한 졸업생 선배의 성추행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해 동아리 내에서 회의를 열어 논의하던 일이 있었다. 실은 그 회의가 있기 수 년 전부터 그 선배는 홈커밍데이 때마다 와서 성추행을 해왔던 선배였다. 그런데 그간 동아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회원이 남학우였기 때문에 크게 공론화되지 못한 채 여학우 개개인이 알아서 조심하는 식으로 지나갔었다. 동아리 내에서 선배층인 나의 경우에도, 그 회의가 있기 전 년도까지는 남학생 중심의 동아리였기 때문에 이를 알면서도 크게 목소리를 내거나 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해에는 여자가 유난히 많이 입부한 해였고, 회장 부회장도 여자였어서 이와 같은 공론화가 가능했던 것 같다. 문제는 이 일을 논의하면서, 회의를 진행하던 임원진이 객관적 정보전달 없이 주관적인 의견을 위주로 감정적인 진행을 하면서 발생했다. 이 때 남자 선배들이 회의를 그렇게 통보식으로 진행하면 안된다는 맥락의 발언을 했는데, 당시 유일한 여선배였던 내가 그들보다 더 심하게 임원진을 몰아붙였다. 임원진은 결국 눈물을 보였고 회의가 중단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17.jpg
  

 사실 나는 너무나 불안했었다. 여자인 임원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회의를 진행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인식처럼 '남자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지만, 여자들은 그렇질 못해서 매사에 감정적이고 일처리를 똑바로 못한다'는 인식상의 구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선배들보다도 더 그들을 몰아붙였던 것 같다. 게다가, 만약 회의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진행된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간에 선배들이 그 결과를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았다. 회원들의 공감을 사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순간 문제가 가벼워질 것을 직감했다. 2시간이 넘게 진행된 그 회의를 통해, 결국 해당 선배는 제명되었고 나는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임원진에게 달려가 사과할 수 있었다. 물론 회의 중에도 이 논의가 감정적으로 진행되면 문제가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며 해명 아닌 해명을 했지만, 대부분의 후배들은 그 때의 일 때문에 한동안 나를 차갑고 냉정한 선배로 보았다고 회고한다. 평소에 남한테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시하는 터라 공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강하게 말하기가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때의 행동을 후회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성과 감성의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

 데보라는 결국 변호인단의 권고에 따라 법정에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변호인단이 그녀의 저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그녀에겐 힘들고 고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 속이야 시원하고 좋겠지만 승리는 멀어진다. 오히려 그녀의 목적을 위해, 홀로코스트가 제대로 기억되고 추모되기 위해 그녀는 당장의 정의감을 참아야만 했던 것이다. 변호인단 역시 마찬가지다. 인종차별적, 반유대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어빙에 대해 발끈하지 않고 차가운 이성과 논리, 자료의 신빙성만으로 재판에서 그를 압도했다. 어디까지나 감성은 이성의 목적이었고(적어도 데보라와 홀로코스트 희생자에게는), 이성은 이를 보호하기 위한 강한 힘이었다.

 한편 영화 < 나는 부정한다 >는 역사적 사실이 여론과 정치적 의도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대중 선동으로 역사의 진위를 결정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렇기에 그 재판은 더 신중한 절차를 통해 진행되어야 했던 것이며 희생자의 증언이 불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재판, 그리고 역사의 검증은 분명히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적 연관 속에 있다. 이는 '역사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라는 원초적인 이유를 되짚어보면 알 수 있는 문제다. '과거를 돌이켜 앞으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기대되는 효과는?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모든 것의 목적은 인간의 감정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고려되어야 할 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끝없이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들에게 공감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성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문화리뷰단태그.jpg
 

[주유신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