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델 H 이야기 - 사랑 : 순수와 광기의 두 얼굴 [영화]

글 입력 2018.02.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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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없다. 위고이다." 이 평은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인간적 내지 예술적 결함을 가졌지만 그의 위대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충을 피력한 말이다. 언젠가 위고의 시 한편에 매료된 적이 있다. 대학 시절 강의실에서 프랑스 시선집을 공부하던 때였다. 자신의 죽은 딸에게 바치는 헌시였는데 어설픈 불어 실력으로 보기에도 그 애상이 수수하면서 아름다웠다. 시인 위고의 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사건이었다.


내일은 새벽부터...
 
- 빅토르 위고
 
내일은 새벽부터 들이 훤해지면
난 떠날 테다. 난 안다, 네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가련다, 숲을 지나 산을 넘어.
이 이상 더 너와 멀리 떠나 있을 수가 없구나.
 
나는 걸을 테다, 나의 눈은 오로지 한 생각에 골똘하여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아무것도 없을 게다
홀로, 낯선 나그네, 굽은 등에 두 손을 맞잡고
슬픈 나에겐 대낮도 밤과 같으리라.
 
나는 저무는 석양 녘의 황금빛도
멀리 아르플뢰르 항구 향해 내려가는 돛단배들도 보지 않으련다
다만 너 있는 곳에 다다르면 네 무덤 위에
푸른 호랑 가시나무와 꽃핀 히드 다발을 놓으리라.


그러나 정작 마음을 찔렀던 파편은 엉뚱한 짚더미 속에 있었다. “해제... 위고의 사랑하는 장녀 레오폴딘느는 결혼한 지 얼마 후인 9월 4일, 남편과 함께 센 강 하류에서 보트를 타다가 보트가 뒤집혀 남편과 함께 익사했다.” 해설 속 몇 줄의 글이 불러일으킨 감흥은 비극을 감안하더라도 좀 이상했다. 장녀 레오폴딘느는 요절해버리고 위고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실어증에 걸리면서 문학 활동을 중단한다. 캄캄한 영혼의 밤을 보내는 시인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자식들의 행방은? 거기에 어떤 아픈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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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트뤼포 감독의 ‘아델 H의 이야기(The Story Of Adele H, 1975) ’를 보았다. 주인공 아델을 연기한 프랑스의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Isabelle Yasmine Adjani)의 외모만 보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 아자니는 그 요정 같은 얼굴로 정신 착란 증세를 섬세하게 연기했다. 아델은, 간략하게 말하자면 미친 여자였다. 사랑에 미쳐버린 그녀는 실존 인물로 저 빅토르 위고의 자식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딸이었다.

아델은 런던의 사교 클럽에서 한 장교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가 미국의 할리 팩스로 발령을 받고 아델의 곁을 떠나게 되자, 아델은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온다. 혼자서 연고지 하나 없는 신대륙으로 건너갈 정도로 아델의 믿음은 확고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핀슨 중위는 그녀를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 한다. 대문호의 딸이어서 잠시 흥미가 생겼던 것일까?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아델은 귀찮은 존재이다. 그러나 아델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핀슨 중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미친 행동에 가까운 집착을 보인다. 핀슨의 조롱 어린 시선이 아델을 뼛속까지 춥게 만들지만, 아델은 그조차 달콤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서서히 손상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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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고립된 상황 속에서 아델의 심신은 피폐해진다. 밤에는 물에 빠져 죽은 언니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고, 낮에는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여관방에 틀어박혀 글을 써댄다. 아델은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사랑은 나의 신앙이다.' 아델은 핀슨 중위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모셔놓고 촛대까지 갖추어 놓는다. 액자를 밝히는 초는 한 번도 불이 꺼진 적이 없는 것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 앞에 서 있는 아델은 마치 성녀와도 같은 분위기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고난도 그녀를 굴복시킬 수는 없으리라!

아델의 광기는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거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택한 것은 이를테면 순교자의 삶이다. 사랑의 권능에 따라 몸과 마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의 부정(否定)이라는 암초를 만난 상황에서는 죽음이 더욱 고상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버리는 완전한 죽음이야말로 상대방에게 예속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사랑할 수 있음을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가 벽 한쪽에 정성껏 마련한 대(臺)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제단이었다. 이전의 아델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사랑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저 촛대처럼 오직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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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여러 장면에는 정신적인 한기가 느껴지는 섬뜩함이 서려있다. 정말로 섬뜩한 것은 아델이 진정 아무렇지도 않게 미쳐있는 모습이지만, 그것이 무서운 것임을 깨닫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소모된다. 아, 그녀는 미쳐버렸구나... 지극히 고요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인형의 그것 같다. 그녀가 서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공기에 기댄 형상인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불이 되어버렸지만 정작 그녀의 눈 속에는 불이 없다. 걸인이 되어 정처 없이 배회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 버리는 장면은 안타까움을 넘어 허무하기까지 하다. 광기의 끝에 다다른 그녀의 영혼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갈망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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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델 H의 이야기’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아델을 동정하거나, 아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극 중 핀슨 중위는 아델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넌 바보 같아!" 만약 그녀가 핼리팩스로 오지 않았다면, 핀슨 중위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생각해본다. 피 속에 흐르는 뜨거운 감정이 각성되지 않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면? 아마 겉보기엔 안락한 삶을 살았을지 몰라도 내면은 끊임없이 지옥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피, 열정과 숭고함과 절절한 연민의 피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기에. 아델 위고라면 다소 온건하더라도 피를 흘리는 삶을 찾아내고, 그녀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을 겪어내었을 것 같다.

아델 H의 이야기는 결코 행복한 결말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는 행복의 잣대를 그녀에게 적용시키기는 싫다. 보답 없는 사랑의 어리석음? 교훈적인 메시지에 매달리고 싶지도 않다. 사랑의 괴로움만을 지적하는 것은 기나긴 시간 동안 사랑을 한 그녀에게 지나친 모욕이 아닐까. 아델이 원한 단 한 가지, 완전한 결합에의 염원을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개념으로 이해, 납득, 정의하려는 시도 또한 우습게 느껴진다. 아델이 사랑한 시간과 비례하여 시달림을 당한 핀슨 중위라면 결코 동의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쓸데없이 진지한 관람객의 입장에서 몇 마디 덧붙인다. 아델의 바닥 없는 갈망이 무섭다. 한낱 인간에 대한 지극한 바람이 서글프다. 그런 사랑은 동의할 수 없지만, 헛되지만, 그럼에도 아델의 이유를 모른 척할 순 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를 읽어낸 것이 아니다. 어렴풋 비춰보고 만 것이다. 그것은 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틈, 비어 있는 곳,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발을 헛디딜 수 있는 그런 아득한 공간 말이다...





영화 속의 인상적인 대사.

"사랑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다면
그 쓴맛에 나를 바치겠다."

"사랑은 나의 신앙이다."


[강사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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