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낯설음에 대한 낯익은 이야기들 [문학]

글 입력 2018.02.2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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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삶에도 구조라는 게 있다면, 그 구조 안에는 탈구조,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해체 또한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살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어쩌면 자주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문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게 전부일까, 하는 식의 의문 말이다. 이러한 의문을 던지는 순간 그동안 내가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내 주위의 모든 공간과 시간들이 나로부터 멀어진다. 나의 일상도, 내가 살고 있는 환경도, 내 주위의 가족과 친구들 모두도 한순간 낯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낯설음’을 다루는 문학들은 우리 모두가 본래 이방인임을 일깨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주변인, 사회부적응자, 심하게 말하면 싸이코이지만 그들의 행동과 생각은 묘하게 공감이 간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항상 세상과의, 타인과의 좁혀질 수 없는 거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고유하다. 그러나 나의 고유함은 때로는 내면의 두려움으로 인해, 때로는 편리함을 위해, 또한 대부분의 경우에는 강제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학습과 경험들로 인해 서서히 옅어진다. 모가 닳아 둥글어진 사각형이 되어 사회 속에서 남들과 부딪치지 않기를 강요받는다. 이러한 은폐된 강요를 들춰내고,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되돌려주는 문학작품 3편을 소개한다. 철학 이론이 아니라 언어와 공감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삶에 의문을 던지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실존하게끔 이끄는 작품들이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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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쉴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걸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서 색이 매우 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정서가 얽혀있는데, 하나는 초반부에서 두드러지는 불안과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후반부에서 깊어지는 절망과 우울이다. 이 두 종류의 정서는 닮은 듯 하지만 서로 구별되며, 동시에 인간 실존의 근본을 이루는 정서들이기도 하다. 우리를 세상에 안착하게 하는 편안함, 행복감과 달리 불안과 우울은 세상과의 균열에서 나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실존의 정서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요조는 합리성과 실용성에 매달리는 인간들, 먹고 살기 위해 투쟁하고, 온 몸에 가식을 두른 채 웃으면서 살아가는 인간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들과 다른 데에서 오는 극도의 불안감은 요조를 광대짓으로 몰아넣는다. 남들에게는 장난꾸러기, 웃긴 사람, 만만한 사람처럼 보이면서 진짜 자신, 우울하고 불안한 자신은 숨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요조의 삶은 사실 우리들의 삶이기도 하다. 남들 앞에서는 둥글둥글하게 웃으면서 내면의 어둡고 우울한 이방인은 애써 숨기고 살아가는 모습. 우리 안에는 인간 본연으로서 실존하려는 내면의 자아와 타인들 틈에서 성공적으로 어울려야 한다는 사회적 자아 사이의 간극과 충돌이 항상 존재한다. 결국 그 충돌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주변인 요조는 우리의 실존적 고민을 대신해 짊어주는 한 명의 순교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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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다른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도, 살인자인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앞에서도, 오직 눈 따갑게 내리비치는 햇살과 어서 빨리 방에 돌아가 자는 것만을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의 무심함, 무감각함으로 인해 그는 이방인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는 슬퍼해야 하고, 단순히 햇빛이 뜨겁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며, 죄를 저지른 사람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등 우리가 당연시하는 상식과 윤리에 그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 뫼르소를 세상은 허위 잣대를 들이대며 ‘심판’하려 한다. 검사는 뫼르소의 살인과 모친상에서의 무심함을 그럴듯하게 연결시켜 그를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살인범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뫼르소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정직하게, ‘햇살이 뜨거워서 사람을 죽였다’라고만 말할 뿐이다. 그는 거짓 감정, 불필요한 도덕, 가식적인 윤리에 그 특유의 무심함으로 대항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저항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자신이 사형수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사형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선고받은 존재이고,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감정이나 윤리도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일 뿐이다. 작가의 말처럼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 존재’하는 뫼르소의 무심함을 통해 우리는 삶 속의 부풀려진 것들, 예컨대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표시된 인용구 출처는 카뮈의 이방인 미국판 서문)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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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한국어판 제목 ‘상실의 시대’가 말해주듯 상실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작품이다. 슬픔, 안타까움, 혹은 공허함 그 어느 하나로도 완전히 치환될 수 없는 감정이 상실감이다.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은 과거에 묶이게 된다. 상실한 대상이 존재했던 과거로, 마음 속 구멍이 나기 전의 시간으로.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상실이 일어난 이후인 현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현재가 영원히 어색하고 낯설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중심적인 상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일부분이 자신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면 남은 나에게도 그만큼의 이 생긴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그 틈새만큼 세상으로부터 유리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들과 세상 사이에는 얇지만 결코 깨지지 않는 유리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더욱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자기 역시 언젠가 죽는다는 필연적인 사실을 환기한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삶을 살아갈 동력도, 삶의 지향점도, 삶에서의 모든 ‘새로움’들도 상실한 채 혼란 속을 방황하게 된다.

지금 이곳, 이 순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떠도는 모든 방랑자들에게, 마음 어딘가에 언제인지도 모르게 생긴 틈새가 아픈 이들에게, 이 소설은 그저 여기 너처럼 방황하는 사람이 또 있다고, 방황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지 출처 : Google)


[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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