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오필리어는 아직, 거기, 전시되어 있다 : 연극 < 5필리어 > [연극]

글 입력 2018.02.2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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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어가 무대에 오른다, 햄릿 없이. 연극 <5필리어>를 향한 관객들의 관심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 관심에 걸맞게, <5필리어>는 오필리어의 목소리를 소환하면서, 동시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했다. 이는 남성 중심 언어 속에서 대상화되고 도구화되던 캐릭터 오필리어와 동시대 여성들의 실존 문제를 엮어내려는 작업이었다. 관객들은 오필리어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를 고찰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햄릿 없인 상상할 수 없다던 오필리어 이야기는, 보란 듯이 2018년 무대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래, 하나는 인정하고 시작하자. ‘지워진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이 연극의 시작점이었다면, 태초의 의도는 높이 살 만하다. 연극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온당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작업의 결과물은 나쁘다. <햄릿>보다도 나쁘다. 2018년에 쓰여, 2018년 무대에 올랐기에 더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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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통은 여성의 신체로 귀결


다섯 명의 오필리어가 물속에서 깨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필리어란 이름은 일종의 샤먼이 되어, 죽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대상화되었던 <햄릿> 속 오필리어완 달리, 수의를 입은 다섯 여성은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5필리어의 이야기는 동시대 여성의 실화를 빌려 담았다. 가부장제의 마리오네트,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 문단 내 성폭력의 피해자, 연예계 성상납의 피해자. 다섯 인물의 면면엔 최근 SNS와 뉴스 상으로 고발되고 있는, 여성의 피해 사실이 담겨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세 번째 오필리어에 관해선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작품은 실제 사건을 고스란히 가져와, 오필리어라는 이름에 그대로 이식시킨다. 극이 창조한 캐릭터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무대를 채우는 건, 독립적인 이름과 성격을 가진 ‘캐릭터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봤을 법한, 누군가의 복화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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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사건을 선택하여 배치하고, 목소리를 만들다보니, 극은 되려 향하려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달려 나간다. 각각의 사건과 목소리를 배치한 플롯은 또 다시 관습적인 여성성을 찾는다. 작품이 보여주는 지워진 목소리, 소외당한 여성은 오로지 ‘신체를 유린당한 여성’이다. 모든 착취는 여성의 신체에 집중되어 있다. 차례로 억압, 강간과 폭력, 물에 잠식된 신체, 강간과 폭력, 원치 않았던 성상납이 펼쳐진다. 견지하는 시선은 동일하다. '신체의 자유를 억압당한 여성들의 고통'이 이야기되고 그들의 눈물과 죽음으로 끝맺는다. 모든 서사는 신체로 귀결되는 반면, 그들의 정신상태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다. ‘미쳐버린 오필리어’의 이유를 찾고자 실화를 늘어놓지만, 정작 ‘미쳐버린’ 은 그저 ‘미쳐버린’으로 남겨둔다. 신체를 유린당한(이유) 후로 미쳐버린 여자(결과)로 서사를 만들 뿐, 그 중간과정은 치밀하게 좇을 생각이 없다. ‘신체를 유린당해’에 모든 방점을 찍고, 이를 고발하는 것이 가부장제의 폭력을 폭로하고, 오필리어의 목소리를 되찾는 것이라 생각하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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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플롯에, 채우는 건 ‘보여주기’ 뿐이다. 폭로는 가학적인 장면을 ‘보여주며’ 제 존재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 형상화는 얼마나 끔찍하고 적나라하던지. 소위 ‘강간 장면’은 한두 씬으로 그치지 않고, 배우들의 몸짓 역시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끔찍하더라. 오로지 여성의 고통을 보여주겠다는 명목하에, 그들의 신체는 적나라하게 전시된다. 그 움직임 어디에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겼나?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한들, 그렇게 길고 잔혹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까? 실제 누군가의 고통을 제 욕심에 잔뜩 전시한 건 아닌가? 실화를 가져온 게 명백한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오필리어란 이름으로 무대에 오른 어느 여성의 삶은, 남성 질서에 한 번, 무대에 의해 두 번 대상화되고 소비된다. 이건 여성의 불행을 팔고 불행을 소비하는, 불행 포르노일 뿐이다.
 
거기에 순결과 꽃잎으로 그들의 고통을 수식하기까지 하니, 도대체 무슨 언어를 해체하겠다는 건지 되묻고 싶어지더라. 여성의 고통을 이야기하겠다, 남성 중심 언어를 해체하겠다 표명해놓고, 순결과 꽃잎이란 수사는 너무하지 않나. 왜 그들의 고통이 구시대의 처녀성으로 수식되느냐 이 말이다. 아무리 셰익스피어의 언어에서 이유를 찾으려 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남성 중심 사회 속 순결을 잃은 불쌍한 여자’가 오필리어이며, 동시대의 여성인가? 그렇담 게으르다. 정말이지 너무.

 
 
극작의 필요성


작품이 보여주고자 한 오필리어가 ‘남성 중심사회 속에서 신체를 유린당한 여성’이라고 치자. 여성과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는 구시대적 관점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우리네 참담한 현실 속, 여성의 신체가 관음과 착취의 오브젝트로 소비되는 건 사실이지 않나. 그런데 그들을 오필리어로 내세웠다면, 그들의 고민과 목소리를 복원했어야지. 그러려고 노력했어야지. 무대의 언어는 작품을 저 깊은 심연으로 침잠시킨다. 오필리어의 목소리를 복원하겠다고, 지워진 여성들의 삶을 복원하겠다고 시작했다면, 그 실존적 외침을 뒷받침할 극작이 필요했다. 가부장제의 폭력, 데이트 폭력, 세월호 참사, 문단 내 성폭력, 연예계 성상납 등 얼마나 문제적인 상황이며, 이에 온당한 목소리를 만드는 것 역시 얼마나 어려운 연극의 작업인가.
 
애초에 대본 없이, 다섯 배우가 조사한 실제 사례를 토대 삼아, 오필리어의 목소리를 만들었다고 연출은 밝혔다. 그 방식 자체를 비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여성의 목소리를 찾아 복원하려던 공동의 작업은 분명, 박수쳐줄 만하다. 그러나 정작 무대의 언어는 너무도 피상적이다. 대사는 인물의 삶이 아니라, 인물이 당한 '사건'에서만 뽑혀 나온다고 느껴졌다. ‘진짜 목소리’를 만드는 작업은 사건을 찾아 피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에 그치면 안 됐다. 그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봤어야 했고, 이를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했다. 여성의 삶에 대한 숙고가 선행되지 않은 채, 사건 안에서만 뱅뱅 도니, 고통의 스펙트럼은 신체로 국한되고, 무대의 언어는 예상 가능한 수준으로 머물 수밖에. 더불어, 뉴스도 하고, SNS도 하고, 칼럼도 하는 말을 연극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대의 언어는 어때야 할까. 함께 고민해야 했다. 화두만 가져다 붙인다고 진짜 목소리, 무대의 목소리가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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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삼은 세 번째 오필리어 시퀀스도 마찬가지. 세 번째 오필리어 서사를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 이야기로 구성한 것은, 연출의 변을 통해, 그 과정상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서사적 통일성이 무너지는 건 둘째 치자. (다른 오필리어의 이야기에선, 윽박지르던 남성의 목소리가 세 번째 오필리어에 이르면, 가난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변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세월호’, ‘단원고’라는 기호를 직접 사용한다고,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복원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기호가 직접적으로 들리지 않는다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게 아니다. 많은 서사는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도 돌이킬 수 없는 비극과 남은 사람들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건 방임이 아니고 비겁함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전국민적 상처에 대한 배려이며, 이야기가 남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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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가만히 있으라’는 끔찍한 실제 발화과 여성의 억압을 엮고자 했다면, 이렇게 해선 안 됐다. 90분의 러닝타임을 모두 할애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아니, 모두 할애했어도 이런 방식으론 안 됐다. 오필리어를 보며 눈물은 나더라. 객석 내의 많은 관객들도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캐릭터의 인생이 깊이 와 닿아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관객 안에 잠자고 있는 트라우마를 ‘아파야 한다’며 찔렀기에, 반사적으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이렇게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는 울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인생을 무대에서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오필리어의 목소리가 맞나요


아픈 곳을 사정없이 파헤친 자리엔 결국 가르침이 채워진다. 다섯 오필리어의 비극이 차례로 끝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잊지 않아야 한다’는 식의 설익은 가르침이 들려온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보여주었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갑자기 극의 분위기가 캠페인이나 공익광고스러운 분위기로 접어들어,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Me_too 운동과 #With_you 운동을 통해, 각계에서 조금씩 사회적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작품 스스로를 전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류에 한 목소리를 보태야겠다고 판단한 것인지. 교조적인 목소리는 메시지를 담으려 안달복달한다. 그 목소리가 정말 오필리어의 것인지, 아니면 창작진 자신의 것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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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를 향한 관객의 요구가 증대하고, 공연계 Me too 운동이 진행되면서, 관성적인 무대는 자연히 비판받고 있다. 그래서 연극 <5필리어>의 시원이었던, ‘지워진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은 분명 필요하다. 공연은 더욱 다양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아야 하며, <햄릿>의 오필리어처럼 대상화되고 도구화된 여성 캐릭터가 아닌, 입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5필리어>의 다섯 주인공처럼, 여성 배우들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공연 역시 많이 만나고 싶다. 시대가 요구하고 있고, 관객이 요구하고 있다.
 
연극 <5필리어>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걸어가는 길은, 가야할 길이며, 먼 길이다. <5필리어>의 첫 의도처럼, 여성의 이야기가 여성의 목소리로 펼쳐지는 방식, 지워진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그래서 한편으론, 공연의 부족한 점을 짚어내며 미안한 마음이 솟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모든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숙고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성적인 얕은 극작으론 필요한 이야기를, 잘 만들 수 없다. 신체 유린에만 치중한 채, 고통을 전시하는 태도, 이어지는 설익은 가르침은 우리가 기다려온 오필리어의 목소리가 아니다. 10여 년간 “윤간 씬”(프로덕션의 표현에 따르자면)의 적나라함을 고수했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또한 그 표현방식을 달리해보겠다고 포부를 밝힌 시국이 아닌가. 창작진이 여성의 고통을 통해 그들의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장면적으로 소비하고 싶은 것인지, 삶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주제의식에 고통이 그저 소비되는 것은 아닌지, 전시되는 건 아닌지, <5필리어>를 포함한, 많은 창작진들의 숙제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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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실감한 것은 있다. 다섯 오필리아의 삶이 연극적으로 과장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이며 나와 내 주변의 삶이라 느껴진다는 것. 그렇다면 작금의 한국 사회는 연극 그 이상의 불행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 무대 뒤에선, 연극보다 더 끔찍하고 추잡한 현실이 검은 입을 벌려, 누군가의 삶을 집어삼킨 걸, 우리 모두가 확인했듯 말이다.

오필리어는 아직, 거기, 전시되어 있다. 헤이 난 나니 나니 헤이 나니, 다섯 오필리어가 내는 곡소리가 유령처럼 떠돈다. 그 곡조는 다시 한 사람의 관객의 입에서 흘러 나온다. 그건 자화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오필리어의 한탄이자, 잘 만든 여성 서사를 기대한 관객으로서의 한탄이며, 다시 먼 길을 돌아올 오필리어를 한없이 기다릴 한숨이다.



공연정보



INTRODUCTION


기  간
2018.02.21.(수)~03.04(일)

시  간
평일8PM / 주말 3PM

장  소
소극장 산울림

티켓가격
전석 3만원
50% 할인 – 매 작품당 1, 2회 프리뷰 할인, 경로, 장애, 국가유공자
20% 할인 – 조기예매, 마포구 거주자, 산울림 티켓소지자
30% 할인 – 학생, 공연예술인

예매문의
인터파크 1544-1555
소극장 산울림 02-334-5915

주최/주관
극단/소극장 산울림, 아트판



CREATIVE STAFFS


원작
셰익스피어 <햄릿>, 공동재창작

연출 김준삼

제작 블루바이씨클프러덕션

출연
신진경, 윤이나, 최영신
최배영, 고다윤, 박진원

드라마투르그 이은지

조연출 류예슬, 손채민

무대디자인 양정우

조명디자인 이윤재

음악, 음향디자인 이다은

안무 박진원

영상디자인 도윤희

의상디자인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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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단 김나윤.jpg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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