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2.27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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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하면서도 다루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 타인의 존재일 것이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타인이 없다면, 세상에 나 하나 뿐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사는 것이 무척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존재는 생존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살면서 만날 수밖에 없고, 어떤 이에게는 삶의 이유가 될 만큼 중요하지만, 항상 이로운 영향만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거꾸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타인이 존재하고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피할 수 없다.

이는 아마 우리의 자아상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남의 자아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상대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에 따라 누군가는 타인에 의해 파괴되기도 한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방법은 없기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상황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있다. 가장 미묘한 것부터 가장 강력한 것까지 정도는 각자 달라도, 적어도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타인의 언행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바로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제목은 <13 Reasons Why>이며, 자살한 고등학생 해나의 친구 클레이가 해나가 죽은 13가지 이유가 녹음된 테이프를 들으며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이 글은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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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유는 해나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데, 다른 작품들에 쓰인 나레이션과는 살짝 다른 부분이 있다. 재생되는 목소리는 해나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한 것으로, 작품 안에서 클레이가 듣는 것을 시청자들이 듣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반부까지 그 톤은 다소 발랄해서, 가끔은 자살한 아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이틴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클레이도 아마 이런 느낌을 살짝 받지 않았을까. 해나가 죽은 13가지 이유에 포함된 한 사람으로서 듣는 마음은 훨씬 무거웠겠지만 말이다. 녹음된 해나의 말에 따르면 테이프는 총 13면으로, 1면부터 13면까지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되어 있다. 해나는 만약 테이프가 다음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사본이 공개될 것이므로 반드시 다 듣고 다음 사람에게 넘길 것을 당부한다.

테이프를 받고 내용을 들은 클레이는 혼란스러워 하며, 왜 자신이 이 테이프를 받은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아마 누구라도 이런 내용을 듣게 되면 “왜 나야?”라는 생각부터 할 것이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은 결코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회피하려는 것이다. 화가 진행될수록 테이프를 받은 다른 아이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오히려 클레이는 피하지 않는 편이다. 해나의 목소리가 가 보라는 곳에 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해나의 말을 거짓말로 치부한다. 은연중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죽은 애 말보다 살아 있는 우리 인생이 훨씬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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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는 자신의 테이프를 듣기 전까지는, 그 자신도 이유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한 일을 회피하려는 다른 아이들에게 잘못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조차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테이프를 들은 후에 사실과 다르다고 항변한다. 이 부분은 클레이와 시선을 같이하던 시청자들이 처음으로 크게 분리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아이들이 “그건 해나의 진실이지 나의 진실이 아니야.”라고 했던 말들이 마냥 변명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여태껏 정의의 사도처럼 해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을 나쁘게만 보던 시선에 변화가 일어난다.

다른 아이들의 진실은 그럴 수 밖에 없었거나,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 몰랐거나, 의도한 것과 달랐다는 것이다. 13개 테이프의 주인공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십대이기에,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십대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은 포터 선생이 13번째 테이프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부각된다. 그들 모두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몰랐으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언행은 나비효과로 인해 태풍이 되었고,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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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살은 본인의 선택이기에, 전적으로 남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해나 또한 자신의 진실에 파묻혀 타인의 진실을 보지 못했으니까. 자신이 밀어냈던 것에 주눅들어 있는 클레이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그 또한 자신을 저버렸다고 여겼으며, 죽은 이유는 아니지만 테이프 중 한 면에 그를 포함시킴으로써 또 다른 나비효과를 초래했다. 예를 들면 죄책감으로 인한 알렉스의 자살처럼. 알렉스는 “다른 남자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한” 과정에서 “장난삼아” 여자아이들의 명단을 작성했고. 명단에 있던 해나의 이름은 “그 전 그녀가 가지고 있던 루머와 결합해” 더욱 질 나쁜 평판을 만들어냈다. 해나가 죽은 뒤 그는 진심으로 후회한다. 그렇지만 죽은 해나에게 진실은 자신이 명단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알렉스의 진실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그와 함께 땅에 묻혔다.

알렉스가 자살한 것이 절대 해나의 탓은 아니지만, 조금 더 소통할 수 있었다면 둘 다 살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꼬이고 꼬인 진실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지 못한 것은 소문만이 안개처럼 무성하게 떠 다녔기 때문이리라. 타인의 진실이 보이지 않으면 당연히 그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 못한다. 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은 이처럼 쉬울까. 인간은 식물처럼 숨만 쉬면서 세월을 보낼 수 없기 때문에,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사회생활을 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당연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은 하나 하나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일텐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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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성인인 것처럼 보이는 상담 선생님 포터에게도 이 기본적인 원칙이 희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성폭행 당했음을 암시하는 듯한 해나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태도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해선 안 될 질문을 한다. 분명히 저항하지 않은 것은 그녀에게 법적으로 불리할 수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해나를 낙담시킨다. 해나의 진실은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포터의 진실은 해나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는 것이며, 객관적인 조언을 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남이 자기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도 성인에게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이며, 결국 진실을 잘 전달하기 위해, 잘 전달 받기 위해 서로가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정말 뻔한 말이지만,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할 때도 의식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남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로 절반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세상에서는, 말보다 더 쉬운 채팅이라는 방법이 있기에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해나의 소문이 퍼진 것도 대부분 문자를 통해서였고, 그것이 그녀가 카세트 테이프라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진실을 전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너무 쉽고, 너무 빠른 세상에서 사람들이 잠시 멈추고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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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기사를 쓰면서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타인에 의해 자신이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결코 타인이 자신을 완전히 파괴할 수 없다고 믿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나의 자아를 파괴한 결정적인 계기는 성폭행이지만, 마지막 희망의 끈을 체념하게 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대처에 대한 절망이라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렇다. 기왕 함께 살아야 할 타인들이라면 서로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산다고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즘 연일 폭로되고 있는 문화예술계 성폭력 가해자들을 보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절망스럽다가도,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이겨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 나 또한 의지가 생긴다.

성폭행은 타인의 인격을 짓밟는 방법 중에서도 가장 고약하고 강력한 방법이다. 이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타인의 자아를 파괴했다는 점을 자각이나 하고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들을 배제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믿는다. 클레이가 브라이스가 저지른 강간을 폭로하고, 오랫동안 데면데면했던 친구 스카이에게 만남을 제안하는 것처럼, 작은 일부터. 그래서 타인의 진실이 외면받지 않고, 인격을 파괴하는 행위가 마땅히 지탄받고, 서로가 받을 수 있는 상처를 배려하는 사회가 만들어질 것을 믿는다.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서 나부터 지금 이 시간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조심히 할 것을 결심하며 마무리를 짓는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13 Reasons Why (캡쳐)


[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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