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문화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넘어, 아트인사이트

글 입력 2018.02.2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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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insight]
문화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넘어,
아트인사이트


어제 에디터 활동을 끝내면서 마지막 글을 등록했다. 등록 버튼을 누르고 나니, 문득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12기 모집 때 썼던 글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썼던 글은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에세이에 가깝게 쓴 것이었다. 존 버거는 문화예술계에 전반적으로 깔린 계급적 환상을 비판하기 위해 책을 썼지만, 사실 나는 그런 비판보다 예술이 생각보다 더 단순할 수 있다는 의견에 매료되었다. 나는 예술을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예술과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서 늘 '예술의 경계'는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지식으로 습득하는 예술은 계속 내가 경험한 것과 다른 무언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감정을 자극해 나를 이끌어온 것도 문화활동이었는데, 여러 활동을 하고 머리가 굵직해질수록 '예술'은 내가 경험한 것보다 더 복잡하고 세련된 것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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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복잡성이란 별달리 좋고 특별한 게 아니라, 곰 인형을 테디베어로 부르고, 아점(아침 점심의 줄임말)을 브런치로 부르는 것을 말한다. 병적으로 깨끗한 벽에 난해한 작품들로 수놓은 갤러리를 볼 때면, 백화점 명품관의 전시 상품이 떠오른다. 왜, 그 있지 않은가. 백화점의 겉면에 장식되는 수많은 디스플레이 상품들. 명품을 사본 적 없는 가난한 서민을 대표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심정을 자세히 묘사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뭔지 모르겠지만 세련되고 예쁜 것 같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시장통에 굴러다니는 가방이랑 옷과 달라보이지 않는데, 루이비똥이라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오묘한 아름다움이 저기에 있는거겠지? 오늘날 내가 느끼는 문화예술 경험과 예술의 경험의 갭이 이런 경험과 무섭도록 닮아있었다. 나는 내심 전시관과 백화점이 그토록 닮아있는 이유가 현대자본주의의 거대한 압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패션학과 미학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만의 예술 경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계급적인 차이로 좌절되는 상황을 지적하는 것이다. 문외한과 전문가는 감상적 차이를 보일 수 있지만, 지식의 차이로 감상의 우열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에 다가설 수는 있겠지만, 한가지 답만 존재하는 작품은 결코 명작이 될 수 없다.

감상이란 개인의 심리와 역사를 훑는 개인적이고 특별한 과정이고, 지식은 글의 설득력을 돋보이게 할 뿐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심리적 성장을 돕는 도구이기 때문에, 당연히 감상자는 평론가보다 우선시 되어야하고, 평론가뿐만 아니라 작가조차 '한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개인의 감상이 가장 본질적이다. 개인의 감상보다 평론가, 예술가의 경험보다 작가의 이름이 우선시되는 순간 전시관은 백화점으로 변한다. 예술이 가진 모호한 특징이 자본과 계급의 침해를 받기 쉽다고 해서,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가 거닐고 있는 곳은 누군가의 내적 세계인가, 화려하고 예쁜 디스플레이 쇼윈도우인가? 이는 나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규정한 이래로 계속 따라왔던 질문이다. 나는 예술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내 정의는 늘 도전받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문화예술계는 꾸준히 아트스타를 만들어내고 있고, 그런 세상의 흐름 속에서 아직도 나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정의 속에서도 굳건히 '우리가 모두 예술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험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경계를 넘어선 경험을 증언하려 한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경험의 중심엔 아트인사이트가 있다. 나는 앞으로의 글에서 아트인사이트가 오늘날 문화예술계에서 가지는 의의를 탐색하고, 그 의의에 맞게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쓰는 에디터로서 어떤 것을 느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문이 하나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더듬 더듬 어색하게 찾아낸 문고리를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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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의 소개에 따르면, 아트인사이트는 훌륭한 콘텐츠의 부족한 홍보 현실에 따른 대안이다. 아트인사이트는 문화예술 단체와 제휴를 맺어 홍보를 해주는 조건으로 프리뷰와 리뷰를 다양한 사이트에 올린다. 아트인사이트는 여러 실무진이 존재하고,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위 말하는 '에디터'들의 리뷰와 프리뷰, 문화예술 관련 오피니언을 통해 굴러간다. 흥미로운 것은 '에디터'가 전문화된 인력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디터 모집은 학력과 경력, 나이와 같은 외부조건이 아닌 문화예술에 관한 생각과 열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에디터들의 글은 전문적인 평론가보다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대중의 모습과 가깝다. 평론가가 아닌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인 이들을 기고가로 채용함으로써 아트인사이트는 두 가지 특성을 갖게 된다. 첫째, 에디터로 지정된 사람들은 '대중'이 아닌 '기고가'로서의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 둘째, 이들의 글은 대중들과 좀 더 친밀한 거리를 유지한다.

사실 아트인사이트는 글을 읽는 사람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에디터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된다. 대중 중에 문화예술을 좋아하고 향유하는 사람 중에 자신의 글을 직접 쓸 기회를 얻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평론가라는 직함 없이는 블로그에 글을 끄적거리다 마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무언가 문화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수많은 경력이 요구된다. 당장 평론가들의 경력만 봐도 입이 벌어질 정도의 학력과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현실에서 다른 외부조건을 보지 않고 뽑은 에디터 활동은 새로운 자극이 된다. 모 문화예술 사이트에 글을 쓰는 기고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글을 쓰는 에디터들은 그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아트인사이트는 이들의 자발성과 열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는 대중들을 교육/양성하고 있는 셈이다. 에디터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문화예술에 관한 성찰을 할 기회를 얻어 더 성장하고, 마침내 정말 '필진'이 되는 것이다.

사실 문화예술계에 아트인사이트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친숙해지려는 시도는 수없이 있었다. 나도 그러한 프로그램에 여러 번 참가 했었고, 그 과정의 실무진에 있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번번이 문화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벽을 느낄 때가 많았다. 예술가나 평론가가 대중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구도는 학교 수업과 별달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예술이 개인(작가가 되었건 감상자가 되었건)의 심리적 세계를 기본으로 해석된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방식은 맞지 않는 데다가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예술을 '배워'간다면,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는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고, 대중들도 예술을 친숙하게 받아들일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험으로 돌아봤을 때,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작품에 애착을 가질 수 있는 법이다. 대중들에게 정말 예술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예술가라는 계급을 먼저 없애야 한다. 대중에게 단순히 문화생활 향유의 기회를 주겠다는 단순히 표를 뿌리고 간단한 인증과 리뷰를 요구하는 방식도 같은 이유로 너무 큰 제약이 있다. 그런 점에서 문화예술 향유자들이 적극적으로 '생산자'의 위치에 서는 에디터 활동은 특별하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거리를 좁히고, 대중과 예술을 더욱 친숙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들이 쓰는 글들이 친숙하면서, 나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예술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나는 4개월가량 활동하면서 아트인사이트에 50건 내외의 글을 썼다. 일주일에 한 두번 꼴로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문화예술을 주제로 글을 썼다. 처음에는 문화전반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게임, 먹방과 같은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썼는데, 후반부에 갈수록 고전과 개인의 성찰을 담는 내용을 많이 썼다. 일주일을 지내다 보면 어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런 기분이 들 때 재빨리 옮겨쓰면 그게 오피니언이 되었다. 그 중의 몇 개의 글은 읽은 사람이 명함에 적힌 메일로 연락을 주기도 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과정은 기고가라기보다 나에게 더 많은 힘을 주고 성장시켰다. 12기 에디터를 끝내고 첫 글의 제목처럼 다른 방식으로 예술을 바라보게 된 지금, 내가 글을 썼던 사이트에 대해 애정이 차오른다. 아트인사이트가 오늘날 문화예술계에서 경계를 넘는 것처럼, 나한테도 에디터 활동은 내 안의 여러 경계를 넘는 경험이었다. 아트인사이트의 새로운 방향성이 오늘날 문화예술계의 저변에 존재하는 경계를 조금씩 흐리게 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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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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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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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마천사
    • 와 ~~~ 아트인사이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바라보고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상당부문 공감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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