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ject 당신 ] 12. 그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 주유신

글 입력 2018.03.0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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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當身)


1. 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
2. 문어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


그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스치듯 지나갔던 낯선 사람의 말 한마디를 이상할 정도로 계속 되새김질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내 인생의 화두와 맞닿는 지점이 있는 ‘어떤 말’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문제. 대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충돌하는 지점이 많고 심지어 감성이나 이성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까지 있는 것을 우리는 많이들 보지 않나. 이성과 감성을 어떤 식으로 조율해야 하는가에 대한 무수한 고민과 회의감이 있었을 때, ‘당신’은 내가 내내 찾고 있었던 적절한 표현을 내뱉어줬다. 감성을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성의 역할이 의미가 크다, 라고.
   
  ‘당신’이라는 사람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를 굉장히 신중하게 선택해서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나는 신뢰를 느낀다. ‘정확하게 도달하고 싶은 욕구’는 굉장히 젠틀한 욕구다. 상대방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인터뷰어라는 내 위치를 망각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면서도 우리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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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1970) by Mark Rothko



Q. 아트인사이트 구독자분들이 알 수 있게 간략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아트인사이트 11기 에디터로 시작해서 지금은 문화리뷰단 그리고 PRESS기자로 활동 중인 주유신 이라고 합니다.
    
Q. 아트인사이트 페이지에서 즐겨보는 글이나 작품이 있을까요?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게시물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나 <프레첼 체다치즈>나 <사자가 끄적일 때>, 아니면 캘리그래피 같이 짤막한 작품기고를 많이 봐요. 의외로 긴 글은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철학에 대한 글이 있으면 한 두 번씩 잘 챙겨보는 편이에요.

그리고 인상 깊었던 건. 음, 제 후배가 아트인사이트에 들어왔어요. 과후배인데 12기 에디터로 들어왔는데요. 그 친구가 글을 쓴 게 있는데, 제가 학교 안에서 연극 동아리를 하는데 그걸 보고서 아트인사이트에다 오피니언을 쓴 거예요. 후기처럼 리뷰를. 그게 헤드라인에 올라와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Q. 유신씨 자신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일까요?
  
저는 채도 낮은 빨간색. 딥한 빨간색. 왜냐면, 되게 열정적인 사람인데 자꾸 스스로를 자제하고 제어하려고 하는 편이더라고요. 신중해지려고. 본능적으로 계속 행동이 먼저 안 나가는 게 있어요. 겁이 많아 가지구. 걱정도 너무 많고. 그래서 이미지로 생각하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채도 낮은 빨간색? 용암처럼 아직 분출하지 못한!
    
Q. 오늘 인터뷰하러 오는 길에서 유신씨가 인상 깊게 본 풍경이나 사람이 있을까요?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무엇을 할 예정인가요?
  
강북을 좋아해요. 특히 여기 광화문 일대랑 인사동 삼청동 일대를 엄청 좋아해요. 보통 약속 잡을 때도 여기 근처에서 자주 잡아요. 아예 광화문 교보에서 만나자고 하거나. 여기 자체를 워낙 좋아해요. 지하철 타고 여기로 올 때 다리 건널 때 멍 하니 밖을 보고.
  
자주 가는 카페나 공간이 있을까요? 책 좋아하시니까 교보문고 많이 가실 것 같은데.
  
네, 교보문고 많이 가고요. 그리고 인사동 쌈지길 근처에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라는 찻집이 있어요. 그 찻집이 있는데 제가 거기를 1년에 한 번씩 꼭 가요. 그냥 너무 좋아요. 되게 좁은 찻집인데 거기서 주시는 떡이나 차도 다 직접 수제로 해서 주시는데 그것도 분위기가 있고. 들어가 보시면 아실 거예요. 전통적인 분위기. 어, 좋다 하는 그런 게 있어요.
  
인터뷰 끝나고 나면 계획이 있으신가요?
  
내일 아침 토익시험을 봐서요. 여태까지 공부를 많이 안 해서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웃음)
    
Q. 유신씨에게 13월이라는 비현실적인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아보고 싶은가요?
  

저에게만 주어진 시간이라면, 그냥 방학이 한 달 더 늘어난 정도? 방학처럼 매일 계획 세우고 매일 일상적으로 살 것 같아요. 1년이라면 모를까 한 달은 뭔가를 도모하기에는 뭔가 짧은? 아니면 아트인사이트 글을 미리 다 써놓고 나중에 한 번씩 풀어 놓는 거죠.. (웃음)
    
Q. (릴레이질문) 이전 인터뷰이님이 주신 질문입니다. “봄이 되면 꼭 방문하는 나만의 장소가 있을까요? 여기에 답변을 해주시고 유신님도 다음 인터뷰이에게 질문을 던져주시면 됩니다.
  
일단 겨울에 방문하는 곳은 아까 말씀 드렸던 인사동 찻집이구요. 봄 되면, 학기 중일 때는 많이 못 나가긴 하지만 보통 서울대공원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거길 가요. 그때가 선선하게 바람이 불어오고. 날이 좋잖아요. 리프트 타고 올라가서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밥 먹고 와요. 너무 맛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한 바퀴 쭉 돌고 다시 리프트 타고 내려오는 거죠.
  
그리고 다음 인터뷰이겐 “제가 요즘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어려운데, 몰입을 위한 자신만의 팁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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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님의 그림. 캔버스에 아크릴.
자신의 정신세계와 비슷한 것 같다며 수줍게 보여주셨다.



Q. 유신님께서 쓰신 글들은 늘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되네요. 사랑, 마음, 운명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대상들을 어렵지 않게 덤덤히 풀어내시는 것 같아요. 그러한 본인에게 귀감이 되는 철학자가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나의 철학관, 세계관을 다져가는 데 영향을 준 인물이 있나요?
  
철학과 다닌다고 하면 다들 ‘너가 좋아하는 철학자가 누구야?’ 물어보는데, 사실 공부할수록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어떤 철학자가 있으면 고등학교 때 <윤리와 사상>에서 배운 건 ‘어떤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라고 한 두 문장으로 기억을 하잖아요. 그런데 깊이 배우면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철학인데 한 두 문장으로 요약도 안 되고 알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네, 그런 경우도 있고. 그래서 겁이 나는데 일단 생각해보긴 했네요.
  
칸트랑 실존주의 철학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르트르.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라는 말을 하는데 보통 종교 같은 것들은 물건에 다 목적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정해진 사명이 있다고 말을 하는데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실존이 먼저다’, ‘우리가 삶을 만들고 우리가 행동을 함으로써 삶을 만든다’, 그렇게 말하죠. 사실 칸트랑은 좀 어긋나는 부분이 있죠. 칸트는 규칙성, 정해져 있는 것을 따르는 듯 한 느낌이라서.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물론 깊이 들어가면 모순되는 지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칸트가 얘기를 하는 게 ‘자기가 정한 기준을 남들에게 적용해 봤을 때 서로에게 피해 없이 사회적으로 합의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행동해도 좋다.’ 그런 느낌인 것 같아서. 그래서 실존주의 같은 철학자들도 ‘자기의 목적과 인생의 행로를 스스로 설정을 하라’라고 하는 거고. 칸트 역시 ‘너의 행동을 다른 사람이나 사회 구성원들과 비추어 생각해 봤을 때 옳다고 생각한다고 그대로 행동하라’ 라고 하는 것 같아요. 그게 그렇게 크게 모순되지만은 않지 않을까.. 해요. 그리고 모순된다고 해도 전 둘 다를 좋아할 수도 있죠. 빨간색을 좋아하는데, 파란색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유를 좋아하는 것처럼, 저도 저의 자유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오히려 무계획보다는 내가 세운 계획을 지켰을 때 이런 태도를 가져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을 지켰을 때 자유롭다고 느껴요. 당장 자고 싶고 쉬고 싶은 육체적인 욕구 때문에 할 일을 못 지키면 오히려 그게 속박 당하는 것 같아요.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런 걸 생각하면 칸트 같은 사람이 좋더라구요. 꽉 막혀 보이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가 정하는 규칙에 따라 항상 지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게 멋있는 것 같아요.
  




  칸트와 사르트르가 동시에 언급되었을 때 의외라는 생각을 했으나 곧바로 이해가 되었다. 여러 얘기를 해주셨지만 결국 ‘당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실존적 주체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의 행보. 때문에 계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더 속박 당하는 기분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납득되었다. 어떠한 가치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가장 나다운 혹은 나의 신념에 부응하는 무언가를 실천’ 했을 때 뿌듯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활력 있는 믿음과 생생한 행동들이 만들어 내는 하루하루를 온전히 느끼고픈 욕구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일부로라도 ‘깊은 신념이 없이 쿨한 멋’으로 살고 싶은 순간들도 참 많은데. 열심히 ‘당신’의 믿음을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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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님의 일상.
기록하고 발전하는 삶을 살고 싶으면서
게임도 좋아하는 모순된(?) 삶이라고 표현하셨다.



Q. 유신님의 글은 여러 가지 매력이 있지만, 오피니언에서 드러나는 유신님만의 사유가 특히 빛나는 요소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사유를 헤쳐 나가는 방식들이 복잡하거나 현란하지 않고 심플합니다. <침묵의 기술>이나 <사랑은 없다>, <아들러의 감정수업>과 같은 책들을 소개해주시는 글을 보면 그게 더 잘 느껴져요. 무덤덤하다고 느껴질 만큼 담담한 문체로 신념이나 고민들을 숨김없이 보여주는데 막연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만약 이런 유신님만의 개성을 더 담을 수 있는 글이나 콘텐츠를 기획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나요? 책도 그렇고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보이시는데 특별히 더 집중하고 싶은 주제가 있을까요?
  

제가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면서 항상 고민을 하는데, 다른 분들 인터뷰 내용을 보니까 ‘글을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저도 그런데.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 하는 게 있는데. 판단이 어렵잖아요. 다 너무 스타일이 다르고 점수를 매기기도 어렵고. 그래서 스스로 세운 세 가지 기준이 있는데

1. 아주 작은 부분이어도 독자가 얻어갈 수 있는 정보가 있어야 한다.
2.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3. 공감이 가고 재미있어야 한다.
  
이 기준에 따라서 제 글을 판단해 봤을 때 제일 부족한 게 정보성인 것 같아요. 기획을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가 아는 것도 없고 뭔가가 부족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것이 엄두가 안 나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은, 저도 공부를 하면서 독자들에게 제가 이해한 바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미학’관련된 책들 있잖아요. 아트인사이트가 문화예술 사이트고 대부분 올라오는 콘텐츠들이 전시 리뷰나 연극 리뷰인데 그래서 기본에 충실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런 ‘미학’ 책들을 읽고 뭔가를 리뷰도 할 겸, 제가 얻은 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려드리는 거죠. 제 글을 보고 얻은 정보를 다른 콘텐츠나 글을 볼 때 적용시켜 볼 수 있을 테니까. 배경지식이 깊이 없어도 새로운 지식을 얻어갈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Q. 왠지 사색을 즐기시는 듯 하여 여쭤봅니다. 혼자서 사유나 사색을 하다가도 정답이 없는 어려운 질문들을 만날 때면 풀 수 없는 평생의 숙제를 만난 기분이 들잖아요. 이를테면 사후세계라던지 꿈, 무의식과 관련한 궁금증 같은 것들이요.
  
혹시 유신님께서도 늘 안고 살아가는 인생의 질문들이 있을까요! 만약 없으시다면, 최근에 잠겼던 사색에는 어떤 물음들이 있었나요?
  

사후세계나 꿈이나 무의식 같은 생각을 저도 많이 했어요.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생각들. 유난히 남들보다 심했던 게 초등학생 때 환생에 대한 글을 쓰고 그럴 만큼. 국어신, 사회신 그려놓고 도움을 줄거야, 하면서 문제들 풀고 그랬거든요.(웃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어요. 주변에 죽은 사람도 그때 없었는데. 언젠가 죽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엄마아빠한테 맨날 그런 얘기나 하고.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무의식이나 꿈에 대한 걸로 이어진 것 같아요. 인간에겐 종결욕구가 있다잖아요. 어떤 게 있으면 거기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있어야 욕구가 풀린다는. 다른 건 답을 낼 수 있어도 이런 추상적인 건 답을 내기가 어려우니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런 것 같아요.
  
특별히 최근에 잠겼던 생각이라면 운명이나 삶의 지표? 전 개인적으로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해진 삶, 같은 건 아니고. 개개인마다 다른 재능이 있고 환경이 있고 타고나는 게 다른데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요. 본인에게 맞게 길이 있어도 무시하고 자기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도 되는 거요. 스스로 목표를 갖게 되면 그것에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게 되는 거죠.
  
좋아하는 책 중에 <연금술사>가 있어요. 거기서도 주인공이 꿈을 꿔서 금은보화가 나왔는데 그걸 찾으러 떠나는 여정을 그린 책인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목표에 도달하게 해주는 여러 삶의 지표가 있거든요. 그 삶의 지표가 전혀 금은보화랑 관련된 일이 아닌데, 당장 눈앞에 놓인 것을 몇 년이고 하고 그러잖아요. 유리그릇 가게에서 알바 같은 걸 한다던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아무리 돈이 궁해도 금은보화가 관련된 것도 아니고 득 될 것 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정성들여서 할 건 없지 않나?’생각할 것 같은데 열심히 하잖아요. 그리고 결국엔 그것들이 금은보화를 찾아가는 지표들이 되어서 궁극적으로 연결되면서 연금술사를 만나게 되잖아요.
  
우리 삶에도 자신에게 맞는 목표를 찾고 포기하지 않으면 삶의 지표들이 나타나고,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해피엔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안 좋은 걸 타고나도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거고. 팔자가 좋아도 게으르게 살면 자기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을 경험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운명이 있는데, 자기가 설정할 수 있는 목표가 있으면 자기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면 되는 거라는 거죠. 극복할 수 있는 운명.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의 일화인데, 일행이 길을 가다가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지기가 막는 거예요.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서 안 된다는 거죠. 자기는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목숨을 걸고 더 들어오지 못하게 그 앞을 지키고 있다는 거죠. 그 일행은 그래도 그냥 지나서 마을 쪽으로 갔어요. 그리고 스승 서경덕에게 물어봤대요. 너무 멋있고 인간에 대한 의리가 있는 저 사람의 사주를 풀어보자고. 그랬더니 스승이 ‘아니다. 저 사람은 그 사주가 어떻든 간에 극복할 사람이다’, 라고 했다는 거예요. 평생 역학을 공부한 사람이니까 100프로 그게 옳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인데, 근데 의로운 어떤 이를 보면서 사주가 어떻든 그걸 극복할 사람이다, 라고 봤다는 게 멋있는 것 같아요.
  
어떤 주어진 제약이나 한계처럼 느껴지는 것을 극복해 내고, 남의 기준에서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자신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고 선택을 하는 것에 의미를 두시는 거네요.
  
그렇죠. 자기에게 맞는 길이라는 게 분명히 있지만, 자기가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설정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거죠.
  
이것 외에 요즘 생각하는 게 또 있는데.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들이 있어요. 목표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설정하는지는 스스로의 몫이라고 했지만 전제는 있다고 생각해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남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는 한에서 가치설정을 할 수 있다고요. 이런 거랑 관련해서 누군가가 저에게 ‘착한 척 하지 말라’라고 한 적이 있어요. 어차피 인간은 누구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거죠. 그러니 마이웨이로 살라. SNS에서도 그런 내용이 많이 올라오는데. 물론 어느 정도는 공감은 해요. 그렇다고 해서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은 동의하지 않아요.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누군가에겐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그러지 않으려하는 제 노력이 무가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신념, 가치관인 거네요?
  

네, 그렇죠. 제 개인적인 부분이죠. 저는 제가 스트레스를 받는 한이 있다하더라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아까 말한 목표인 것이죠. 전 그렇게 목표 설정을 한 거죠. 결과적으로는 그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그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겁이 많고 걱정이 많다고 그랬지만 내 눈엔 심지 굳은 사람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자주 ‘회의주의자’라고 칭하면서 다닌다. ‘의미’라고 믿었던 것들이 ‘무의미’로 전락해버리는 순간들이 참 많고 ‘무의미’였던 것이 모르는 사이에 ‘의미’로 전환되는 기적들도 종종 있고.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없어서 그냥 편하게 (다른 말로는 무책임하게) ‘회의주의자’이기를 선택했다. 나의 ‘회의감’은 그럴듯한 맥락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도피’ 비슷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내 눈 앞의 ‘당신’은 ‘운명은 있지만 극복해낼 수 있는 길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굉장히 막연한 말인데 그만큼 가능성이 많은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강한(?) 회의주의자인 내게 위안이 되는 지점들도 있다. 회의주의자로 사는 지루함을 달래줄 때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삶에 대한 새로운 ‘긴장감’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다른 이의 강한 믿음 앞에 서면, 내가 사는 방식을 다시 정의 내려 보고 해석해보고 싶어지게 되는 법이다. ‘당신’은 첫 인상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무뎌질 대로 무뎌진 내 가치관을 스치고 지나간다.





Q. 저번에 아트인사이트 신년회에서 해주셨던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이성과 감성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 유신님이 해주신 대답이 제겐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거든요. 둘 다 중요한데, 어느 것 하나가 크게 우선이라기보다는 감성을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성의 역할이 의미가 크다, 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데 영화 <나를 부정한다>도 생각이 나고, 고개가 끄덕거려지더라고요.
  
이에 관해 유신님만의 더 깊은 얘기를 듣고 싶은데, 부탁해도 될까요? 철학을 전공하고 계시니 철학적으로 설명해주셔도 좋고 유신님의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해주셔서 좋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인간은 궁극적으로 감성을 추구하고 그게 더 중요하고 그런 걸로 마음을 나누고 하는 것이 맞지만, 공적인 자리나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어떤 결정권을 사용해야 할 때 감정의 힘이 좀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아니, 감정이 약하기보다는 이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느낌의 것이라고 해야 하나요? 감정은 물론 이성보다 셀 때도 있죠. 사람들이 한꺼번에 와, 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니까. 그러나 중립적인 사람들까지 설득하고 단체나 공동체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 있다면 이성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에게 감정과 이성의 퍼센티지를 따진다면 99프로의 감성과 100프로의 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199프로의 상태인 거죠.(웃음) 이성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서로 부딪치는 감정들을 합의의 테이블로 옮겨질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성의 역할이 감정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성은 감성을 전달하기 위한 무기인 거죠. 무조건 감정적인 사람들을 보면 설득력을 저하시키기만 하고 타협을 안 하겠다는 것으로 보여요.





  처음의 우려대로 나는 인터뷰 내내 맞장구를 치고 말이 많았다. 그만큼 즐거웠다. 그래서 헤어지는 길, 운명을 믿지만 철저한 ‘실존주의자’인 당신에게 문득 책을 한 권 추천해 주고 싶었다. 미겔 데 우나무노의 장편 소설 <안개>. 실제 한 사람의 삶 혹은 무의식을 경험하는 느낌이 들만큼 놀랍고 섬뜩한 지점들이 많은 작품이다. 저자가 실존주의자이기도 하다. 즐겁게 읽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당신의 ‘후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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