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족의 역할보다 개인으로, 탈근대의 가족윤리에 관한 단상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3.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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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가족의 역할보다 개인으로,
탈근대의 가족윤리에 관한 단상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족에 대한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 필자는 가족을 사회학적 관점으로 정의할 때, 사회변화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는 역동적인 집단, 끊임없이 사회와 교류하는 일종의 열린 관계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가족과 그 구성원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헤게모니가 만들어낸 역할을 부여받는다. 사회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인 가족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치열한 경제 성장과정을 거쳐 한국은 가부장 역할을 아버지에게, 안주인 역할을 어머니에게 씌웠다. 가족의 '역할'은 이미 문화화 되었다. 당장 지겹게 느껴지는 자기소개서의 한 줄을 떠올려보자. '엄하지만 책임감 있는 아버지, 한없이 부드러운 어머니.' 아빠 새는 어미와 자식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다음 못 위에서 꼬박 밤을 샜고, 어머니는 늘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

 지식기반사업이 중심이 되는 현대사회에서 여성인력이 적극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기술과 체제의 발달은 '집안의 가장'의 역할을 뒤흔들어놨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로 넘어온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족 구성원들은 역할을 요구받는다. 필자는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근대 가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탈근대화 시대에서 가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를 고찰해보려 한다. 이해를 위해 이 과정에서 두 권의 책과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끌어오려고 한다. 필자는 우선 감독 홍재희의 <아버지의 이메일>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근대적 가족구조로 인해 고통받는 아버지에 대해 조명하고,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모성신화를 비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집>을 통해 탈근대화된 가족의 가능성에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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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압축적이었다. 개발도상국의 목표는 '경제 성장'이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국은 따라잡아야 하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할 시간 없이 재빠른 모방이 필요했다. 목표와 효율성을 슬로건으로 걸고, 국가 주도의 수출중심 산업화가 추진되었다. 덕분에 압축적 성장을 일궈냈지만, 결과를 위해 국가는 늘 준 전시 국가체제를 유지했다. 권위주의는 필요악이 아닌 발전을 위한 동력이었다. 시간과 의사소통이 압축되고, 명령과 복종이 조직의 기본형태로 자리 잡았다. 사회의 가장 작은 구성원인 가족도 그에 반응해, '아버지', '어머니', '오빠', '누나' 등의 역할을 분배했다. 그것은 가족들의 자율적인 합의가 아니라, 사회적 요구에 따른 강제적 조정이었다. 자본주의는 많은 도시 임금 노동자를 바랬고, 자본가는 더 훌륭한 노동력을 바랬다. 남성 노동자는 경쟁자를 줄여 더 높은 임금을 받길 바랬다. 이런 입장이 적절히 어우러져 남성은 가장으로서 가족 전체를 부양할 임금을 대표로 받고, 여성은 집에서 미래의 노동력을 양육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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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역할 분배 속에서 아버지는 가족을 위한 산업역군으로, 어머니는 희생적 모성을 가진 존재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는 존재로서 권위를 인정받았지만, '인력'으로 인정받았다해서 그가 정말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아버지 생활비 부담률은 95.6%로 세계 1위고, 2006년 행복가정 재단에서 조사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지수는 56점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소위 ‘돈벌어오는 기계’로서 도구화 되었다. 오늘날 아버지들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는 더이상 난제가 아니게 되었다. 늦은 시간 퇴근해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 정서적으로 소외되었고, 가부장으로서의 책임과 권위만 남았다. 사랑받기 위해 권위를 휘두르지만, 정작 사랑받지 못하는 한국의 아버지들을 필자는 너무 많이 봐왔다.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이메일>은 아버지의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난 다큐멘터리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미워하던 딸이 아버지의 죽음 후, 여지껏 읽어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메일을 읽어 본다는 내용이다. 아버지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의 격동 속에서 실존했던 개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발견하면서 내용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다큐멘터리 속 아버지는 돈으로 아내와 구속하고 권위를 확인받기 위해 노력한다. 부양자지만 가족 내에서 도구화되고 소외되는 것이 오늘날 아버지의 현주소다.

 모성의 존재로서의 어머니 역시 근대 사회에서 도구화되었다. ‘안주인’이라는 말처럼 여성은 공적영역에서 활동하는 대상이 아닌 사적영역의 주인이 되었다. 공적 영역이 좌절된 여성은 가족을 통한 영향력 행사를 통해 존재를 인정받길 바란다. 자녀는 자신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길로서, 사회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길이다. 어머니는 항상 ‘모성의 존재’ <엄마를 부탁해>의 내용을 따르자면 예수를 끌어안은 피에타상과 같은 존재로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을 베푸는 존재다. 신경숙의 소설은 어머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 상에 그대로 부합한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 자신의 욕구를 지우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등 어머니는 말 그대로 희생의 대명사였다. 소설은 늘 곁에 있었던 어머니가 사라진 상황을 통해 어머니가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게 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작가는 엄마의 희생을 넘어 휴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했겠지만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있다. 소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엄마를 다시 한번 부르게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희생함으로서 생겨난 모성신화는 정말로 감동적이기만 한 것일까?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에서 어머니는 희생 당한게 아닐까? 부모의 사랑보다 모성에 그토록 온갖 어구가 붙는 이유는 다분히 사회적 요구에 따른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모성에서 타인을 배제하고 희생을 남기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오늘날에도 모성을 찾을 수 있다. 자식들의 학업에 힘쓰고 학원을 데려다주는 어머니는 다분히 희생적이다. 이 경우 자녀교육은 가족사업이며, 어머니는 일종의 기획 매니저가 된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는 어머니일뿐, 개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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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형의 집>에서 등장하는 어머니, 노라는 <엄마를 부탁해>에서 나오는 박소녀와 전혀 다른 행보를 걷는다. 남편인 헬메르는 권위적이고 능력있는 남편이고, 노라는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아내다. 그들은 판에 박힌 듯한 상류층 가정에서 행복한 것 처럼 보였지만, 노라는 그녀를 끝까지 그의 작은 새장에 넣으려는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제목처럼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의 집에 놓여진 인형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녀를 옥죄는 집을 벗어남으로써 엄마가 아닌 인간이 된다. 박소녀가 ‘엄마’였다면, 노라는 ‘엄마’를 초월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사는 존재다. 인간은 그런 사회와 집단의 구성원이기 전에 그 스스로다. 따라서 그는 감히 희생당할 수 없는 존재다. 노라의 출가는 자녀에 대한 책임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이런 비판이 자연스러운 것은 모성의 특성이 우리 안에도 자연스럽게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라의 선택은 여성주의 일각에서 ‘모성은 허구다’라고 부르짖는 오늘날에도 치열한 토론의 주제가 된다.

 오늘날은 ‘탈근대’시대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도 표현되는 오늘날은 합리주의에 따른 질서와 구조를 넘어 감성의 부활을 꿈꾼다. 근대사회에서 무질서와 혼란은 교정되어야 할 존재지만, 탈근대사회에서 그것들은 다원화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다. 느슨해진 기준 속에서 인간은 좀 더 자유로워진다. 헬메르는 노라가 떠난 뒤 기적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서 기적이란 사랑을 기반으로 사회의 조건과 가치를 뛰어넘어서야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근대적인 헬메르도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도 이제 기적을 생각해야할 때다. 필자는 결코 모든 어머니가 집 밖을 나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윤리’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윤리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할 도리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져야 할 제 1원칙은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존중과 이해다. 만약 존중과 이해보다 의무와 사회적 요구가 우선시 된다면 우리는 근대사회의 문제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가족은 사회의 영향을 받는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친근한 단체다. 이 모든 병폐가 있음에도 가족에게 사랑과 보살핌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변화된 시대에서는 역할이 아닌 개개인으로서 이해하고 사랑하는게 어떨까?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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