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시인의 일

도서 '한 글자 사전' 리뷰
글 입력 2018.03.0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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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은 분류가 애매한 책이다. 누군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딱 한마디로 답하기가 어렵다. 책에는 'ㄱ'으로 시작하는 단어부터 'ㅎ'으로 시작하는 단어까지 여러 단어들이 제시되어 있고 단어 밑에는 작가의 정의나 설명이 달려 있다. 한 문장으로 정의되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설명이 몇 장을 넘기기도 한다. 실제 사전처럼 가나다 순으로 단어가 실려 있지만 그 밑에 달린 설명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시'라고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시적이다. 신기한 건 이 책을 함께 읽었던 엄마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어떤 부분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걸까. 느낌이 먼저 왔고 느낌을 설명하기 위한 이유를 찾는 건 그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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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시'를 찾으면 '문학의 한 장르.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 형식에 따라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로 나누며, 내용에 따라 서정시, 서사시, 극시로 나눈다.'고 나와 있다. 명료하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 설명이었다. 이 책의 작가는 '시'에 대해 총 세 문장을 설명으로 달았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언어를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움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이었다.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언어는 본래 타인에게 나의 생각이나 어떤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도구로서의 언어는 사실을 전달하거나 주장하는 글을 쓸 때 강조된다. 정확하고도 적합한 표현을 위해 사전을 찾다 보면 비슷한 단어임에도 그 뜻이 미묘하게 모두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언어를 다루는 내가 충분히 섬세하지 못해서, 정확하지 못해서 상대방이 곡해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시를 쓸 때는 다르다. 시는 언어가 도구로서 사용되기보다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의 사전적 의미보다도 시를 쓰는 주체가 단어에 부여한 주관적인 의미가 더 강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시인이 재정의한 언어로 구성된다. 시를 즐겨 읽는 사람들은 모호하고 난해한 단어 사용에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가 전복되고 불명확한 언어들 사이에서 헤메이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일상적인 단어가 주는 낯선 느낌은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글자 사전>은 김소연 시인이 재정의한 단어로 가득하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이미 알고 있던 단어가 시인을 거쳐 어떻게 다시 설명되는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지 확인한다. 이 책이 연과 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에도 시를 읽는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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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짚어 나가다 보니 <한 글자 사전>이 어떤 책인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이 재정의한 단어들로 차 있는 이 책을, 나는 '시의 뼈대'라 부르고 싶다. 시가 완성된 퍼즐이라면 이 책은 그 퍼즐조각들이 모여 있는 박물관 또는 수집장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아직 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시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언어를 마음껏 기웃거릴 수 있다. 시인을 거쳐 재정의된 단어들은 평상시에 흔히 쓰거나 사전에 실린 설명으로 이해할 때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248쪽


시인이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은 시를 읽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글을 쓸 때, 말을 할 때 찾아온다. 사전적 의미대로의 단어도 제대로 사용하기 힘든데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모두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시인의 일을 하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서도 우리는 모두 다른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자연스레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반영된다.

오늘도 수많은 풍경을 머릿속에 담았다. 실타래처럼 엉킨 단어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그리고 섬세하게 한 단어를 건진다. 씨앗을 땅 속에 심고 무엇이 자라날까 궁금해하는 아이처럼 건져낸 단어를 마음 속으로 충분히 머금는다. 여러 번 굴러다니고 다듬어진 다음에 그 단어는 마침내 나만의 시선이 담긴 '나의 단어'가 된다. 그러니 김소연 시인의 '씨'와 나의 '씨', 그리고 엄마의 '씨'는 그 사전적 의미는 같을지라도 다른 단어이다. 나만의 '한 글자 사전'을 만든다면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내용들로 채워질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설 때 비로소 언어는 시가 되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 우리는 모두 오늘도 시인의 일을 하고 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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