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꾸 멀어지는 이름, 아버지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3.09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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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뚝뚝한 막내딸이다. 막내딸들은 대부분 애교가 많다는 사람들의 편견을 몽땅 깨트린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바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보다 매일 만나는 부모님이 나를 더 모를 만큼 내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다. 이런 무뚝뚝함은 특히 아버지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간다. 어색한 마음에 예쁘게 돌려 말하지 못하고 툭툭 거칠게 말을 던지고, 물어보는 말에도 건성건성 말하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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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中 한 장면


 최근에 주말에 부모님과 둘러앉아 KBS에서 방영하는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을 보았다. 배우 천호진 씨가 연기한 '서태수'의 대사가 내 마음을 울렸다. '부모도 사람이야. 부모도 더럽고 치사해, 자식한테.' 왜 부모님도 나와 똑같이 많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까. 부모님은 매번 나를 받아주고,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상처 같은 건 받지 않을 줄로 알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아버지 '서태수'의 모습은 나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했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어머니와 주말부부가 되셨다. 토요일 아침에 내려와 일요일이 되면 다시 집에서 2시간을 가야 하는 먼 지방으로 떠나신다. 10년이 넘게 아버지의 얼굴은 주말에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주일 중에 5일이 아버지 없는 일상이 익숙해졌다. 아버지는 가끔 오시는 손님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데면데면 대하고, 내 개인적인 감정과 일에 대해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굳이 아버지에게 모든 걸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먼 지방에 있는 아버지가 물리적인 것 이상으로 멀리 느껴졌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와 있는 주말을 서먹하게 보냈다.

 아버지가 없는 일상이 당연해지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에게 '진지 드세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같은 형식적인 이야기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와 아버지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멀어져만 간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으면서도 그 거리를 좁히는 방법을 몰라 멀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 아버지는 어머니와 산에 올라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내가 꼭 돈만 버는 기계처럼 느껴져.' 어머니는 이 말과 함께 아버지에게 자주 안부 전화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또 주저주저하며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휴대폰에 아버지의 번호를 띄워놓고도 쉽사리 전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아버지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내가 항상 이런 관계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아버지와 나는 가끔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까운 사이였다. 내가 가장 또렷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주말 아침마다 내 방으로 들어와 나를 직접 깨우시던 모습이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다정한 말투로 나를 깨우시던 아버지는 나의 몸과 마음이 커갈수록 사라져갔다. 이제는 더 이상 내 방으로 쉽게 발을 들이시지 않는다. 나를 깨우실 때도 방문을 열지 않고 문 밖에서 내 이름을 부를 뿐이다. 전화 버튼을 보며 아버지에게 전화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나와 방문 앞에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아버지가 닮아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서로에게 남보다 더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꽃나무의 미열

                               이규리

한 줄 문틈을 그은 불빛이 빗장 같아
불 켜진 아이 방 앞에 서서
늦은 시각을 벌컥 열지 못하겠다

자주 먼 곳을 향하는 아이를 훔쳐볼 때
슬그머니 끼이던 낯선 공기
백합나무도 제가 피운 꽃등은 못 보겠지
내가 짚어볼 수 없는 저 아이의 미열은
이제 나무의 것일까

아버지가 그립지만 같이 있고 싶단 뜻은 아니에요
그건 내 말이었다

꽃들이 언제 피어야 할지 가지에게 물은 적 없듯이
저 아이의 새벽, 스탠드 불빛은
쓸쓸한 먼 길일지 모른다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방문 열고 나오는 아침이 있고
그러면 나는 또 짐짓 이마를 짚으며
음, 음, 날씨 얘기나 꺼낼지도 모른다


 이 시를 읽고 있자니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20살이 되고, 나에게 '이제 아가씨가 다 됐네!'라며 장난스레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가족들과의 시간보다 이제 밖으로 나가있는 시간이 더 많은 딸을 보며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멀어져버린 딸의 방 문 앞에서 딸에게 전처럼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고 싶지만 어쩐지 멀게만 느껴져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 딸의 방문 앞에서 방문을 보며 주저주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상상이 가서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이제는 남보다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사람.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실거야. 내가 하는 생각.'이라며 사적인 이야기를 물어보실 때면 매번 말끝을 흐리며 대충 대답했던 날들. 아버지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어떤 모양의 상처를 입으셨을까. 시가 내 마음 한구석을 바늘로 쿡 찔렀다. 하루에 있었던 일은 뭐든 말하든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있었던 일들을 숨기고 입을 굳게 다문다. 당신의 무뚝뚝한 막내딸은 오늘에서야 나를 알지도 못하는 시인이 쓴 글을 읽고 당신을 떠올립니다.





이미지 출처
KBS 황금빛 내 인생 예고편 캡쳐


[김하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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