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냥'의 가치 : 그림책 노란 우산 [도서]

의미 없는 것의 의미
글 입력 2018.03.13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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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림 - 책

집에는 언제나 책이 많았다. 키가 제멋대로인 책꽂이들이 사방에 널려있었고, 그 안에는 키가 제멋대로인 책들이 제 몸을 뺐다 넣었다 해댔다. 동화도, 과학 책도, 백과사전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딸의 손에 그림책을 쥐어주셨다. 그림과 글이 함께하는 책이 아니라, 그림만 있는 책을. 가장 먼저, 가장 자주. 단지 글보다 그림이 쉽다는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을 테다. 제 딸이 생각을 하길 바라셨고, 저만의 생각을 하길 바라셨던 게 아닐까.



1. 인생의 실 (Thread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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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오래 두고 보는 영화는 해리포터 혹은 몬스터 주식회사라 하겠다. 손에 꼽는 ‘인생 영화’는 따로 있지만, 이는 계속 보아도 보게 되는 ‘인생의 영화’와는 다른 개념이다. 눈이 가고 손이 가는 작품. 내 인생에 끊이지 않는 실처럼 함께하는 작품. 대체로 실을 ‘얇고 길게’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실이 가진 힘이 결코 얇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얇은 채로 엄청난 길이를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세상 모든 책 중, 나에게는 ‘노란 우산’이 그러하다. 인생의 책. 인생의 실.

그 시작점이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다. 내 나이 올해로 스물둘이고, 이 책에는 이후에 나온 ‘보림 출판’이 아닌 ‘재미마주’라고 적혀있으며, 책 마지막 장의 ‘초판 1쇄 2001년 5월 5일 / 초판 9쇄 2004년 5월 11일’이라는 기록은 우리가 꽤나 오래된 친구임을 보여준다. 10년에 몇 년을 훨씬 덧붙인 그 시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노란 우산을 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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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 없는 비 오는 날

첫 장을 넘겨보니 회색 길 위에 집 한 채, 그 앞에 노란 우산 하나가 전부다. 제목이 우산이고 그림이 우산인데 빗방울이 없다. 떨어지는 비가 없다. 그런데도, 비가 온다.

빗방울 없이 비가 느껴진다. 책장을 넘길수록 비가 선명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 마음에 내리는 것이다. 류재수 선생님의 그림이 아주 어렸던 나에게도, 훌쩍 자란 나에게도 비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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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온통 회색 세상임에도 전혀 우울하지 않다. 우산들이 회색을 밝혀주기 때문. 첫 장에 노란 우산 하나. 다음 장에 노란 우산 하나 파란 우산 하나. 그다음 장에 노란 우산 하나 파란 우산 하나 빨간 우산 하나. 우산들이 모인다. 색이 모인다.
 


3. 음악 -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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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란 우산은 그림책이 아니다. 그림&음악 책이다.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의 내가 책과 감정을 나눌 수 있었던 데에는 음악의 공이 더 컸을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은 이 책의 그림에 더 눈물이 맺히는 만큼 그때는 음악에 더 집중했을 수도 있겠다. 그 정도로 음악을 뺀 <노란 우산>은, <노란> 혹은 <우산> 두 짝 중 하나를 잃는 셈이다.

신동일 작곡가님의 작품으로, 1번 트랙의 배경음악은 하나의 그림에 하나의 곡 총 13개의 음악이 담겼다. 이 음악과 함께하는 그림은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더 많은 것이 보이게 한다. 어쩌면 류재수 선생님께서 ‘빗줄기 없는 비 오는 날’의 소신을 지킬 수 있으셨던 용기는 음악이 온전함을 더해줄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4. ‘그냥’

음악이 온전함을 더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만약 온전하지 않다 해도 그 또한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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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한 여자중학교에 미술 교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한 학생이 스케치북에 별 하나를 덩그러니 그려 놓았는데, 젖소 무늬를 연상시키는 얼룩 별이었습니다.

“참 별난 별이구나? 무슨 의미가 있는거니?”
“아무 뜻도 없어요. 그냥 그 별의 특징이에요.”
아이는 툭 대답하고는 별 실없는 질문을 다 한다는 듯 계속 그림에 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비 오는 아침, 창밖으로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노란 우산》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 이성적 경험에 의한 문학적 의미 또는 문학적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을 물을 증류하듯 의도적으로 제거해 가면서, 오직 투명한 시각적 이미지 자체만을 표현하는 데 나름대로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노란 우산》에 담고자 한 것은 예술의 내재적 가치를 정점으로 하는 그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며, 어린 영혼들이 지닌 빛나는 색이 이리저리 뒤섞이며 순간순간 다채롭게 그려 내는 조화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노란 우산》이 세상에 나온 뒤 쓸데없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많은 어른들이 의문스럽게 물어 올 때마다 나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무 뜻도 없어요. 그냥 색들의 즐거운 리듬을 표현한 것이고, 그것이 이 그림책의 특징이에요.”

- 작가의 말



5. '노란 우산적 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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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나는 ‘많은 어른들’ 중 한 명으로 자랐다. 쓸데없이 생각이 많고 머리는 의문으로 가득하다. 단 하나의 표현을 마주해도 의도와 의미를 찾기 위해 시간을 쓰는, 여러모로 복잡한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아이다워지는 순간에는 언제나 마음 안에 노란 우산이 펴진다.

노란 우산 CD 속 “비 오는 세상”에 맞추어 율동을 만들어 춤을 추던 어린아이는 청소년으로 자라 불면증에 맞서 양 대신 노란 우산을 세었고, 더 자라나 어른이 되어 생각에 갇혀있을 때면 어김없이 노란 우산을 펼쳐드는 중이다.

생각 없어지는 순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냥’도 괜찮다. 무언가에 이유를 붙일 필요는 없다. 이런, 아주 간혹 찾아오는, ‘노란 우산적 마인드’랄까-
  



[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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