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1492 콜럼버스'에서 재창조되어버린 역사 [영화]

글 입력 2018.03.2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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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492 콜럼버스’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는 자주 들어봤다. 강대국의 입장에서 쓴 역사 미화 이야기라고 알고 있었는데, 기회가 되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영화 ‘1492 콜럼버스’의 콜럼버스 이야기는 ‘재창조’에 가까웠다.

다소 개인적이지만, 나는 윤리적으로 그른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나는 문화예술 쪽에 관심이 많은데, 내가 문화예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메시지’이다. 제작자는 매체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을 것이고, 향유자는 그 메시지를 전달받고 분명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작자는 예술이 사회적으로 끼칠 영향을 고려하여 작품 활동을 해야 한다. 이러한 내 가치관 때문에, 나는 영화 '1492 콜럼버스'가 상당히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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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맨 처음부분에 ‘역사는 만장일치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영화가 지속되는 2시간 39분 동안 콜럼버스가 계속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기도 하고, 이 영화의 감독이 조명하고 싶었던 콜럼버스의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에서도 콜럼버스의 잘못된 모습이 나오기는 한다. 항해의 시작부터 콜럼버스는 항해가 7주 혹은 더욱 빠르면 6주까지도 가능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아무도 그 항해를 함께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구가 콜럼버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설득도 하고 화도 내보지만 콜럼버스는 완강하다. 그는 완강하게 잘못된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콜럼버스가 완벽하게 반박할 여지도 없이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영화에서 표현하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이 이후 영화에서 콜럼버스는 상당한 면죄부를 받는다. 한 가지 예시를 들자면, 콜럼버스는 극중에서 다른 인물에게 ‘몽상가’라는 단어를 듣는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느낌으로는 콜럼버스는 몽상가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때 몽상가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즐겨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즉 콜럼버스는 자신이 해낼 거라고 한 것을 해내기에 - 아메리카 대륙 발견 (비록 동야은 아니었지만) -  단어의 정의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자신이 몽상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보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에는 콜럼버스에게 “당신은 실패한 거야.” 라는 말을 남기는 인물을 보여준 이후에, 콜럼버스와 신대륙의 실상을 여왕에게 고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때 대사들은 콜럼버스의 잘못을 한두 문장 언급하고, 그와 함께 “그는 귀족들을 무시했습니다.”와 같은 대사를 덧붙이는 구조를 주로 취한다. 예를 들자면, ”그는 중요 요직에 형제들을 임명했으며, 그는 귀족들을 무시했습니다.” 혹은 “콜럼버스는 또 귀족들도 노역에 동원했고 기독교도를 이방인과 동등하게 취급했고 그런 그의 행동을 목시카가 항의하자 그를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와 같은 것이다. 귀족이 자신들이 원하는 권리를 얻지 못하고 그에 대해 뱉는 투정처럼 느껴지고 이는 앞서 언급하는 콜럼버스의 잘못들도 전부 신뢰성을 낮춰버리는 효과를 낸다. 이런 식으로 은근히 나타나는 정당화는, 영화 내내 계속된다.

이처럼 영화 ‘1492 콜럼버스’는 콜럼버스의 야망, 개척정신, 도전정신 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인 콜럼버스의 항해일지를 읽으면 콜럼버스에게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가치는 ‘종교, 황금, 돈’이다. 물론 영화에서도 종교, 황금, 돈과 같은 요소들이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콜럼버스와 대척점의 서는 이들의 목적으로 주로 표현된다. 콜럼버스는 영화에서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대하는 인물에게 “안돼, 내 방식대로 하겠어. 우리는 평화를 원해.”라고 말하곤 한다. 영화만 봤을 때는 콜럼버스는 굉장히 인간적이고, 원주민들을 하나의 거의 동등한 인격체로 본다. 원주민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이 잘못되어가는 것처럼, 영화 내에서 신대륙에서 콜럼버스의 잘못은 독단적인 고집, 그리고 지나친 낙관성과 도전정신 정도로만 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콜럼버스의 잘못은 역시 영화 내에서 상당히 미화된다. 콜럼버스의 끝없는 도전정신과 여러 반대세력 사이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자신의 꿈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콜럼버스는 제국주의적인 마인드를 크게 가진 사람이었다. 콜럼버스 항해일지에는 ‘그들은 명령을 내리거나 일을 시키거나, 작물을 심게 하거나 필요한 그 밖의 모든 일을 시키기에 아주 적당합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역사는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이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보면서 후대 혹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성찰하고 반성해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들을 담은 매체들 역시 지나치게 편파적인 의도를 드러내면 안 된다. 영화 ‘1492 콜럼버스’로만 콜럼버스를 접한 사람들은 영화에서 표현된 콜럼버스를 기억할 것이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굉장히 노력한 도전주의자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이 막대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영화 외에도 여러 매체의 제작자들은 사회적 책임감을 좀 더 가졌으면 한다.


[김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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