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에게 물들어가는 푸른 세제 '한 스푼' [문학]

글 입력 2018.03.22 20:1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411.jpg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 표지
 

로봇, 사람과 유사한 모습과 기능을 가진 기계 혹은 무엇인가 스스로 작업하는 능력을 가진 기계를 말한다. 인공지능 로봇은 고도로 발달된 현대사회의 척도이며 동시에 인간소외현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많은 매체를 통해, 로봇이 인간 노동력을 대신하는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더 많은 육체 혹은 더 나아가 정신일지도 모르는 노동에서 인간의 자리를 로봇이 차지할 것이란 예측도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직종이 사람들 사이에서 안전성 있다고 선호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게 인간과 인간의 경쟁이 아닌 인간과 기계의 경쟁이 도래하고 있는 듯하다.


sunny.jpg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그런데 여기 어느 작고 낡고 가난한 동네에서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며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명정'이 있다. 이러한 명정에게 어느 날 인공지능 로봇 소년이 배달되고, 명정을 비롯한 동네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소년은 인간 감정을 알아간다.

지식과 현상의 데이터베이스가 메모리 되어있고, 경험을 학습하고 쌓아가면서 단순히 인간을 ‘흉내’내는 로봇과 복잡하고 정교한 계산으로도 답을 얻기 어려운 변수들이 불쑥불쑥 등장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교감이라 하면, 다들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스토리에, 억지 감동을 짜낼 뿐이라고 불평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정의 작은 세탁소를 통해 번져나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기구하면서도 현실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의 이야기와 로봇 은결이 몸 안 어딘가에 갇혀 있기도 밖으로 흘러넘치기도 하는 인간의 감정과 정신을 이해해가는 과정이 나에게 스며들어 눈물 ‘한 스푼’이 되었다.
  


  

주인인 명정의 ‘삶’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고 그에게 만족을 줌으로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해가는 소설 속 로봇 ‘은결’은 나로 하여금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덧없음’, ‘가치’와 같은 상반된 수식어를 붙인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한 스푼의 시간 中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를 맺어왔고 맺을 것이지만, ‘관계’는 늘 어렵다. 심지어 이미 맺어왔던 혹은 맺고 있는 관계도 낯설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곤 하다. 그것이 자연스레 맺어져있던 혈연관계든, 인위적으로 맺어간 관계이든. 그래서인지 소설 속 위 구절이 빠르게 날아와 날카롭게 나에게 박혔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먼지가 쌓여 더럽게 느껴지는 먼지더미가 되듯이, 티 나지 않는 어떠한 ‘사소함’이 하나씩 쌓이고 쌓여 관계를 덮어버린다. 한 톨의 먼지라도 쌓이지 않게 노력하고 또 노력했음에도 맥없이 탁- 풀려버리는 관계의 끈으로 인해 지칠 때가 있다.

그런데 문득 소설을 보고 있자니 명정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은결의 존재가 부러워졌다. 은결은 그 자신을 위한 의미가 아닌 명정을 위한 의미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한 스푼의 시간 中

 
주인 명정이 세상을 떠나고 명정의 뒤를 이어 자신을 봐주던 세탁소가 있던 동네에 작은 꼬마였던 ‘준교’마저 떠나고 준교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딸에 이르기까지 그 곁을 지켜왔던 로봇 은결에게 한 인간의 삶은, 그 시간은 면적이 큰 도화지에 작게 찍혀 있는 검은 점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흰 도화지에 작은 점일지라도 그것이 하찮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기에, 검은 점 한 개기에, 그리고 한 스푼의 시간이기에 인간은 그것이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에 온 감정을 쏟아 붓는다.

슬픔, 분노, 사랑, 아픔, 행복, 희망 …





그래서 나는 나의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살아 있는 나날들에, 맺어지는 관계들에, 생기는 감정들에 충실해보고자 한다. 이것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에게 떨어져 녹아내린 푸른 세제 한 스푼이다
 

여러분에게 스며들 푸른 세제 한 스푼은 어떠한 종류의 것일까? 어떠한 모양을 가졌을까?
이것은 아마 <한 스푼의 시간>을 읽고 난 스스로만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KakaoTalk_20180319_154441146.jpg
 
 
[이혜선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