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3월에 내리는 눈에게 [문학]

글 입력 2018.03.22 22:4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3월의 중턱도 넘어갔는데 뜬금없이 눈이 내렸다. 떠나간 겨울을 아쉬워하는 미련처럼 찔끔 내리는 게 아니라 오는 봄을 두 팔 벌려 마주하듯 한없이 눈은 내렸다. 봄날의 함박눈이라, 시간이 뒤집힌 것 같았다.

3월의 눈은 이상하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내리는 함박눈을 맞고 있자니 잠시 따뜻했던 지난날이 진짜인지, 아니면 이 눈이 진짜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니어야 계절의 흐름에 일관성을 부여하던 나의 상식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월에 내리는 눈은 환상이다.

문득 3월에 눈이 온다는 샤갈의 마을이 생각났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의미 없는 이미지로 그린 시


교과서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는 이 시는 시 “꽃”의 작가이기도 한 시인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작품이다. 샤갈의 그림처럼 환상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한 마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목할 점은 시인은 자신이 사용한 시의 이미지에 어떠한 의미나 관념도 넣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다가올 봄은 희망찬 미래를 의미한다든가, 내리는 눈은 사랑을 뜻한다든가, 하는 식의 의미는 담겨있지 않은 것이다. 그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문자로 옮겨 놓았다.

우리는 시를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혹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으려 한다. 예컨대 눈이 내리는 것은 무슨 ‘뜻’인지, 사나이의 정맥이나 겨울 열매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이미지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이미지 자체로서 존재하고, 독자들도 이미지 자체만을 보고 느끼게 한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그림과도 같다.



언어와 이미지 사이


사람마다 훌륭한 그림 내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의 기준은 모두 다르겠지만, 나는 그림을 볼 때 그림 외에 다른 설명은 필요 없는 그림이 좋다. 그림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이미지이다. 따라서 그 기본에 충실한, 예컨대 직선과 곡선의 형태나 색의 배합, 구도 등에서 나오는 느낌에 충실한 그림이 좋다. 상징이나 비유가 많은 작품은 피하는 편이다.

이러한 나의 미술 취향은 재작년 “샤갈, 달리, 뷔페 전”을 보러 갔을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공교롭게도 이 또한 샤갈을 다루는 전시이다). 색채의 화려한 조합만으로 내게 감동을 주는 샤갈의 작품들에 비해 시계나 서랍장 등 여러 물체에 상징들을 담은 달리의 작품은 초현실주의라는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에도 불구하고 왠지 끌리지 않았다. 달리의 그림은 그림 외에 부차적인 언어적 설명을 토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봐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색과 대상, 구도 등 그림의 기본적인 요소들만으로 그의 세계를 표현한 샤갈처럼 시인도 거추장스러운 상징 없이 이미지만으로 시를 쓰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꾸미기_the-persistence-of-memory.jpg▲ 여러 상징과 의미를 담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시 역시 예술의 한 갈래라면, 김춘수 시인의 시론(詩論)에 많은 공감이 간다. 다만 그의 시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색한 이유는 아무래도 시각예술과 언어예술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림과 같은 시각예술에 비해 시와 같은 언어예술은 직관적 감상, 말하자면 ‘한 눈에’ 보고 느끼기에는 힘든 장르이다. 왜냐하면 언어예술은 언어가 매체인 이상 순수하게 이미지만을 나타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미지를 나타내든 언어를 통한 묘사가 동반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독자에게는 ‘읽기’라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따라서 샤갈의 그림과 그 그림을 언어로 묘사한 시 사이에는 감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시인이 말했듯이 언어예술 중에는 운문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데에 가장 적합하다. 그래서 작가는 시라는 장르를 선택해 최대한 이미지만을 드러내며 샤갈의 세계와는 또 다른 자신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ivillage.jpg▲ 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전해지는 샤갈의 "나와 마을"

 

눈 아래 올리브 빛


환상처럼 3월의 눈은 생명을 피워낸다.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내려와 새로 돋은 정맥에도, 겨울 열매에도 덮인다. 눈 덮인 정맥과 겨울 열매는 푸른 봄의 생기를 머금는다. 특히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라는 행이 이 시의 핵심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 탁월하다고 생각되는데, 무엇보다도 ‘물이 든다’라는 표현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올리브빛을 ‘띤다’ 혹은 올리브빛이 ‘감돈다’ 등 비슷한 다른 어떤 시어보다도, 물이 든다는 시어야말로 봄눈 아래의 열매가 서서히 생기로 차오르는 비현실적이고 설레는 순간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 같다. 눈은 본디 차갑지만, 3월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아궁이에 지펴진 불처럼 어딘가 따뜻하다. 시인은 눈 덮인 올리브빛에서 그 따뜻함을 본 것 같다.

한편 나는 3월의 눈이 다른 의미로 따뜻했다.



이상해서 따뜻한


모든 게 낯설던 3월이었다. 따뜻한 봄에 나만 혼자 내리는 눈 같았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내 의식을 미끄러져 사라졌다. 불과 어제 일도 아득한 옛 일처럼 기억이 희미했다. 주변의 공간들과 그 공간 안의 사람이며 사물이며 모두가 어색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이 너무나도 막막했다. 따뜻한 봄 날씨에 잘 동화된 사람들은 나에게서 넘을 수 없는 간격만큼 저만치 멀어진 것 같았다. 몹시 아팠는데 환절기 감기에 걸린 건지 마음의 병에 걸린 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나만 혼자 아픈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을 하는 병이었다.

그 와중에 내리는 3월의 눈은 어이없었고, 그 어이없음이 어이없게도 위로가 되었다. 이상한 날씨가 이상한 나를 덮어주었다. 힘든 나는 3월의 눈을 맞으며 피식 웃어버렸다. 날씨도 이렇게 변덕을 부려가며 응원하는데 힘을 내야지 않겠냐고. 나도 약간은 올리브빛으로 물든 기분이 들었다. 매서운 눈보라가 봄 햇살보다 따뜻한 이상한 3월의 하루였다.



내용참고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2013. 11. 인문과 교양)


[김해랑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