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름에 대하여 - I [기타]

몸짓에서 꽃이 되기까지
글 입력 2018.03.2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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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대하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이어,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비로소 상대가 꽃이 되었다는 구절도 함께한다. 기억을 짚어보면, 나를 드러내는 거의 모든 순간에 나의 이름을 가장 먼저 활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발표 자리이든, 초면인 두 사람이 저를 소개할 때든. 심지어 신입생들이 즐겨 한다는 술 게임에서도 돌아가며 이름을 말하는, 일종의 의례 같은 행위가 그 시작을 맡는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얻는 것 또한 이름이다.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후손들이 나의 이름을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낸다. 이름 따라 살아간다는 속설처럼, 이름은 한 사람에 대한 많은 것을 보여줄지 모른다. 하지만 이름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들은 하나로 귀결된다. ‘나’라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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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에 대하여

대한민국에서 다섯 명 중 한 명은 김 씨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김 씨 성을 가진다. 내 옆자리에 앉은 김씨, 내 친구 김씨, 출근길 2호선에 만나는 김 씨들, 여자 김 씨, 남자 김 씨, 아이 김 씨, 할머니 김 씨. 같고 다른 세상 김 씨들이 오늘도 숨 쉰다. 직장인들이 활보하기 딱 좋은, 낮 열두시에서 삼십분 더 지난 시각, 강남역 한복판에서 ‘김 대리!’를 외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개를 돌리겠는가? 다수를 타겟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취하며, 광고나 작품에서는 김 씨를 활용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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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 표류기>에 대하여

내가 본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는 단연 처음이었다. 엔딩 크레딧 CAST 명단 속 인물 이름이 ‘김ㅇㅇ’이 아니라, ‘김 씨’라고 표기되는 경우는 최초였다. 심지어 명확한 이름이 있는 배역이었음에도 분명하게 male Kim 정재영 , female Kim 정려원이라는 문구로 표기되어있었다. 작품에서 주인공 이름 두 세 글자가 담는 함축적 상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를 가질 정도로 그 가치가 크다. 의도적으로 Kim을 적어냈다는 사실이 <김 씨 표류기> 감독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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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김 씨에 대하여

남자 김 씨의 이름은 김승근이다.

작품을 일시정지해가며 다시 돌려보기 전까지, 작품 내에서 남자 김 씨의 이름이 제시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김승근’ 석자는 스쳐 지나가듯 들린다. 남자 김 씨는 이름을 숨긴 적이 없다. 동시에 그의 이름을 드러낸 적도 없다. 빚더미에서 생활하다 당장 자살을 눈앞에 둔 이에게 본인의 이름이 주는 감흥이 얼마나 미미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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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실패와 함께 무인도에 고립된 남자는 갑자기 生의 의지가 불타오른다. “수정아, 수정아!” 하며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 배터리에 목숨을 걸고 헤어진 연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승근 씨’ 혹은 ‘야, 김승근’과 같은 호명조차 없이, 돌아오는 말은 “내 이름 부르지 마. 나 너 까먹었어. 끊어.”라는 쌀쌀맞은 대꾸뿐이다. 이어 걸려온 전화에서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불린다. “김승근 고객님 맞으십니까?” 참으로 의미 없는 이름 불리기와 대화가 오간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남자의 상황에서 이러한 부름 속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며, 결코 꽃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 남자 김 씨야 말로 <꽃>에서 말하는 ‘몸짓’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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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김 씨에 대하여

여자 김 씨의 이름은 김정연이다.

누구나 <김 씨 표류기>의 주인공이 남자 김 씨일 것으로 생각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하지만, 영화의 엔딩에서는 표류하는 김 씨가 한 명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여자 또한 여자 김 씨였던 것이다.

“굳이 방 밖을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내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진짠지 가짠지는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건 오직 리플뿐이니까요. 되고 싶은 인생이 있으면 회원가입만 하면 됩니다. 나이도, 직업도, 얼굴도 얼마든지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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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히키코모리’인 여자 김 씨는 자신을 철저히 숨긴다. 여자 김 씨의 모든 생활은 쓰레기와 옷가지가 널려있는 작은방에서 이루어진다. 방 안에서도 사회생활, 일, 사람들과의 교류는 충분히 이루어낼 수 있다. 인터넷 홈피를 통해 김정연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여자 김 씨가 택한 방법이다. 그녀는 이름이 알려지는 일을 가장 두려워하며, 아무도 없어야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일 년에 딱 두 번, 민방위 훈련 때에만 스스로에게 아무도 없는 바깥세상을 찍기를 허락하고, 그 밖의 모든 날에는 아무도 없는 달 사진을 찍는 일을 사랑한다. ‘꽃’이 되기를 거부하는 그녀는 자발적으로 ‘몸짓’으로 남아있기를 자발적으로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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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김 씨들에 대하여

여자 김 씨의 규칙적인 생활리듬이 깨진다. 남자 김 씨가 적어둔 ‘HELP’의 발견이 그 시작이다. 꾸준한 관찰에 이어 HELP가 HELLO로 바뀌는 순간, 남자 김 씨에게 리플을 달아주어야겠다 다짐한다. 비록 헬멧으로 중무장한 어둠 속 여정이지만, 3년 만에 재개된 여자 김 씨의 첫 외출이다. 밤섬을 향해 던진 유리병 안 쪽지는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남자 김 씨에게 도달하고, 서로 이름도 모르는 두 김 씨의 몸짓이 소통하기 시작한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남자 김 씨는 위로받았고, 홀로 있기를 자처한 여자 김 씨도 위로받았다.

하지만 “Who are you?” 라는 질문을 기점으로 여자 김 씨의 몸짓이 끊긴다. 이름을 공개하는 일도,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도 피해왔던 여자 김 씨가 들어서는 안 될 질문을 들어버린 것이다. 꽃이 될 뻔한 두 김 씨는 소통의 공백 동안, 다시금 각자의 풍랑에 휩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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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에 대하여

영화는 두 김 씨의 대면에서 마무리되지 않는다. 굳이 “Who are you?”에 대한 여자 김 씨의 대답까지 보여준다. 여자 김 씨는 “My name is 김정연. Who are you?"로 답한다. 이 문장에서,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절정에 이른다. 결코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다. 간단한 대답이 아니다. 여자 김 씨에게 이름이란, 나의 전부를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숨기기만 했던 나라는 사람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다. 몸짓이 꽃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름을 불러줄 준비가 된 사람, 이름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 모두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꽃이 된다. 꽃의 몸짓, 꽃의 눈짓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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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 씨에 대하여

세상과 끊긴 남자 김 씨가 있다. 세상을 끊어낸 여자 김 씨도 있다. 이 표류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김 씨다. 이렇게 보면 이 씨도, 박 씨도, 최 씨도 모두 김 씨다. 우리는 떠돈다. 우리는 아프다. 하지만 우리는 꽃이 될 수 있다. 우리 김 씨는, 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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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의 목적은 영화 <김 씨 표류기> 소개에 있지 않으며, 제목 그대로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글 제목에 영화 타이틀을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에 대하여 - II는 다른 영화 한 편,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감사합니다.

(어느 토요일의 김 씨, 김예린)

   
[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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