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도서]

글 입력 2018.03.2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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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치열하다. 나의 경우에는, 학교에 가기 위해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나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또 버스로 갈아타는 과정을 매일 아침 반복하고 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절대 줄어들지 않는 과제를 한 뒤 집으로 돌아온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포기할 것은 포기해가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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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단편소설집 '카스테라'>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는 것, 나의 노력을 어떤 값으로 돌려받는 것은 곧 산수(算數)나 다름없다. 저마다의 산수에 따라,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 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p.73)’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주인공 ‘나’는 중학생 때 도시락을 전해주러 아버지의 직장에 찾아간다. 허름한 직장에서 가냘픈 표정으로 사무를 보는 아버지를 목격한 순간, ‘나’의 마음속에는 <나의 산수>와 같은 게 생겨난다. 그날 이후, ‘나’는 조용한 소년이 된다. 친구들이 기약 없는 미래를 꿈꿀 때 ‘나’는 알바를 하고 돈을 모은다.



<나의 산수>는 왜 '나'를 조용한 소년으로 만들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에도 값을 매긴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노동이 아버지에게 어떤 값으로 돌아왔는지를 목격했다. 시간당 삼천오백 원을 받기 위해 낡은 사무실에서 가냘픈 표정으로 일을 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가치를 값으로 환산한 결과가 딱 그만큼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동시에 ‘나’도 결국은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산수>다. <나의 산수>를 통해 현실을 계산했기 때문에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산수에 따라, 사소한 일에 나의 노력을 더하고 빼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나의 산수>를 깨달은 뒤로 ‘나’는 여러 알바를 전전한다. 편의점과 주유소에서 일하던 ‘나’는 코치형의 소개로 푸시맨 알바를 시작한다. 역에 사람이 몰리는 출근 시간에, 지하철 문이 열리면 사람들을 열차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이었다. 푸시맨 알바를 하고, 경찰서와 병원을 꾸준히 오가고, 새벽에 지친 몸을 열차에 실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p.91)

열차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간 사람들처럼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으로 우리의 몸을 밀어 넣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더하고 빼는 산수의 연속이다. 얼만큼의 대가를 얻기 위해 노동력을 지불한다. ‘푸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산수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니까, 살아남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은 온통 ‘푸시’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유난히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무겁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파아, 하아.
그리고 여전히 열차가 들어오고,
누군가가 압력에 의해 튕겨나왔는데,
그런가 했는데

아버지였다. (p.81)


푸시맨 알바를 하던 ‘나’는 지하철역에서 아버지와 마주친다. 그리고, 아버지를 열차 안으로 밀어 넣는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그 뒤로 종종 아버지를 밀어 넣으면서 ‘나’에게 면역력이 생긴다.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날, ‘나’의 어머니가 쓰러진다. 동시에 어머니의 봉급은 사라지고, 할머니의 약값과 어머니의 치료비만이 남는다. ‘나’는 어머니의 병실에서 눈동자가 잿빛이 된 아버지를 마주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라진다. 늘 그래왔듯 아버지를 열차 안으로 밀어 넣은 어느 날,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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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온다. ‘나’의 집은 ‘무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한 산수를 할 수 있’(p.91)을 정도로 숨이 트인다. 여느 때처럼 ‘나’는 푸시맨 알바를 끝냈는데, 눈앞에 기린이 나타난다. ‘나’는 기린이 아버지라는 것을 직감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들려준다.


무관심한,
그러나 잿빛의 눈동자가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기린은 자신의 앞발을 내 손 위에 포개더니,
천천히,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p.93)


기린은 목이 긴 초식동물이다. 풀을 먹는 동물이니 먹이를 두고 육식동물과 피를 흘리며 싸울 필요가 없다. 다른 초식동물은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도 쉽게 먹을 수 있다. 긴 목을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위험한 존재가 있는지 둘러볼 수도 있다. 낮은 곳에서의 생존에 지친 아버지는 결국, 긴 목을 빼들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기린의 삶을 택한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산수>는 온전히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일 수도,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것일 수도 있다. 이전에는 계급 차별을 통해 <산수>가 결정되었다. 이 구조는 현대에 이르러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외형만 바꾼 채 여전히 사회에 남아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있어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결국 돈에 의해 계급이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산수 안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돈이 많은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그렇지 못한 아이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는 사회 구조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살아남기 위해 뛰어다닌다.

그래서, 내 또래의 청춘들, 생계를 위해 뛰어다니는 나의 윗세대들, 그리고 크고 작든 어느 사회에 속해 있는 모두에게 안부 인사를 건넬 뿐이다.


오늘도 잘 살아남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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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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