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얼씨구! 이런 고전은 대환영이니라 : 정동극장 기획공연 < 적벽 >

글 입력 2018.03.27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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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이 싫어?


“세 줄 요약 좀.” 긴 글 밑에 짤막한 댓글 하나가 띡 달린다. 다 읽기 싫다는 소리다. 그러니 핵심만 짧게 말하란 소리다. 뭐, 이젠 놀라운 풍경도 아니다. 요즘 사람들, 참 긴 글 싫어 한다. 네이버 뉴스엔 기사 요약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 않나. 유튜브 인기 동영상엔 사회 이슈를 이미지와 자막으로 설명하는 ‘야매’ 뉴스가 좌르륵 줄 세워져 있지 않나. 전공자라고 유별난 건 아니다. 문자 텍스트를 가까이하는 사람도 스크롤을 슥슥 내리며 대강 훑어 넘기는 일이 부지기수다. (경험에 기초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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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와 서먹한 이유도, 여기서 하나 찾을 수 있을 거다. 판소리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사람의 고수로 긴 서사를 구연하는 장르 아니던가. 시각과 청각, 심지어는 촉각까지 자극하는 오락 매체들이 곳곳에서 손을 뻗쳐오고, 모니터 속 긴 글마저 부담스러워 하는 판국에, 판에 사람을 모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길게는 8시간 이상을 연행하는데, 판에 들어서서 “세 줄 요약 좀” 하지 않으면 다행인 거다.
 
 
 
소리는 보이고 움직임은 들리고

 
판소리가 예술적 고유성을 버리고, 대중화에 힘써야 한단 소리는 아니다. 범대중적인 “얼쑤!”를 얻고자 할 때, 타개법은 무엇이냐는 거다.

정동극장 기획공연 <적벽>은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적벽가>라는 고전 판소리를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가. 이에 <적벽>은 ‘역동성’이라 답한다. <적벽가>는 본래, 단 한 사람의 목소리로 대규모 전쟁을 묘사하는 판소리인데, 이 작품은 역동적인 안무와 볼륨감 있는 소리로 <적벽가>를 재구성한다. 안무가의 말처럼, 소리는 보이고, 움직임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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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 울리는 북소리는 공연장을 시답게 채워 넣고, 현대 악기와 전통 악기의 조합은 웅장하면서도 세련됐다. 특히 드럼 소리는 사운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공연 내내 활용하는 흰색 부채와 빨간색 부채는 펼 때마다 짜릿한 느낌을 선사하는데, 부채 펴는 소리가 가슴 떨리게 할 줄 누가 알았겠나. <적벽>의 소리는 참말로 구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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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소리, 움직인다. 배우들은 목마를 타고 창을 하는 등, 소리에 안무를 더해(안무에 소리를 더한다 해도 좋다) 무대만의 에너지를 만든다. 이 중 적벽대전 시퀀스는 제한된 무대에서 최대한의 역동성을 구현해낸다. 수만 명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도, 무기가 날아가 꽂히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도, <적벽>은 해낸다. 사람의 움직임과 소리만으로 적벽대전은 강렬히 재현된다. 열아홉 명의 한정된 인원,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을 가지고도 이런 운동성을 보여줄 수 있구나 싶을 정도다. 역동성이 주는 짜릿함에 객석 곳곳에선 “좋다!”, “얼씨구!”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젠더 프리, 놀이의 진면모  


한편, 구성적인 면에서도 굳어 있지 않다. 여배우가 연기하는 공명과 주유는 난생처음 만났더랬다! 으레 <적벽가>를 무대화한다 할 때, 남배우만 그득그득한 구성을 떠올리기 쉬우나, 작품은 관성적인 길을 걷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은 생물학적 성에 얽매이지 않고, 배우 모두를 한 인간으로 환원시켜버린다. 남배우와 여배우의 의상을 달리한다 거나, 움직임에 차등을 둔다거나 하는 고착된 젠더롤에서 벗어나, 모든 배우를 나아가, 모든 인물을 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주인공 없이, 계급장도 떼고 노는 ‘놀이의 힘’은, <적벽>의 젠더프리 롤로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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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공명 역의 임지수 배우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뽐낸다. 그가 중심에 선 동남풍 시퀀스는 직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잡고, 초점이 복잡한 작품을 안정궤도로 안착시킨다. 북소리와 역동적인 군무가 무대를 꽉 채우는 가운데, 중심에 서서 장면을 끌어가는 힘은 만만한 내공이 아니다. 공명이 나올 때마다 내적 환호를 보낸 관객이 나 뿐은 아닐 거라 확신한다. 여배우가 맡았던 공명, 주유, 정욱, 군사들 모두 인상적이었기에, 다음엔 유·관·장 등도 여배우가 맡으면 어떨까, 하는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아는 만큼 보이리라

 
크게 벌어진 한 판 놀이는 즐겁다. 하지만 낯선 서사를 따라가는 일은 녹록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삼국지를 잘 모르거나 <적벽가>를 처음 들어본 대중에겐, <적벽>의 이야기도 요원히 느껴지리라. 이를 고려해, 스크린을 통해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고, 프롬프터로 가사를 보여주는 등 포석을 깔아 놓긴 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 했던가. 프롬프터를 기웃거리다간 군무를 놓치기 십상이고, 무대에만 시선을 두자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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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이해 못해도, 눈은 무대를 보고 귀는 소리를 듣는다. 그럼 뭐가 뭔지 몰라도, 작품의 볼륨감에 일단 즐거울 게다. 그거면 된 거다. 프롬프터를 기웃거리다가도, 이해가 안 가서 갸우뚱하다가도 어느새 발가락은 까딱거리고, 입에선 “얼씨구!” 소리가 맴돌리라. 그것만으로도 <적벽>은 충분히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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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을 발아하게 한 <삼국지>나 읽어볼까나. 고어(古語)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데도, 긴 글과 친하지 않은데도, 궁금해진다.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세 줄 요약을 요구하는 시대에 이 정도면 꽤 큰 결심을 한 거다.

고전을 보기 좋게, 듣기 좋게, 재미있게 무대화했으니, <적벽>은 현대의 이야기로서 성공한 게 아닐까.
아무렴! 이런 식의 고전은 언제나 대환영이다.



공연정보





INTRODUCTION


공 연 명
2018 정동극장 기획공연 <적벽>


공연일정
2018년 3월 15일(목) - 4월 15일(일)

공연시간
화 - 토 8시 / 일요일 3시 (월 쉼)

공연장소
정동극장

러닝타임
90분 내외

관 람 료
R석 50,000원 / S석 30,000원
학생할인 15,000원 (24세미만)

관람등급
8세 이상

주최‧제작
정동극장



CREATIVE STAFFS


스 태 프
대본‧연출 정호붕
안무 김봉순  음악감독 이경섭 
비주얼아트디렉터 박선희
작창‧소리지도 유미리  작‧편곡 김창환
무대 김대한  의상 김연향  분장 이지연

출    연
윤석기 정지혜 최하늘
김강산 이건희 정보권 정혜수
윤영진 이금미 이재박 이재현 강나현 이건호
이성현 임지수 이유리 엄  지 심예은 이용전

연    주
타악 강성현  고수 추지훈
아쟁 김범식  대금 김철환  피리 오영빈


웹전단.jpg




프레스 명함 업로드.jpg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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