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아돌로로사 : 십자가의 길 14처 [문화 전반]

당신이 걸어간 그 길
글 입력 2018.03.2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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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어 Passion은 '열정'과 '고난'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둘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과도 같은 것. 그래도 가끔씩은 궁금해진다. 삶은 열정에 더 가까울까. 고난에 더 가까울까. 나 자신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 열정의 단맛도 고난의 쓴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기에. 하는 수 없이 그 분-예수 그리스도-께 여쭈어볼 수밖에 없다. "당신은 과연 행복하셨습니까?"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을 기념하는 고난 주간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부터 부활절 직전까지의 일주일을 경건하게 보내는 기간이다. 많은 교회가 이 기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특별한 행사를 진행한다.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동숭교회는 누구나 손쉽게 참여하며 묵상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림을 통해 묵상하는 '비아돌로로사 : 십자가의 길 14처'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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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개신교 장로교회 '동숭교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는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 '슬픔의 길'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길을 일컫는다. 동숭교회는 교회 안의 여러 장소를 선별하여 순례길을 연상하게 하는 동선을 짜냈다. 각각의 장소에는 공감각적인 그림 묵상의 자리를 마련했다. 누구나 순례자가 되어 복음서에 나오는 장면과 연관된 열네 개의 장소를 따라 걸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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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Sieger Koeder 1925-2015)의 그림


묵상에 쓰임을 받은 명화는 독일의 예술가이자 사제인 지거 쾨더(Sieger Koeder 1925-2015)의 작품이다. 그는 교구 사제로 사역하며 다양한 장르에서 예술 활동을 펼쳤다. 전시회나 출판 매체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는 특별한 소명을 실천했다. '십자가의 길'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15점의 그림은 2000년 출간된 책 'The Folly of God- A Journey of the Cross : A Path to Light'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전시 기획은 최소연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동숭교회 문화부가 담당했다.


"예술가인 제게도 그림묵상은 놀라운 첫 경험입니다. 지거 쾨더의 그림은 예술작품이기에 전부 다 이해 할 수는 없는 미묘한 표현과 아우라가 있어 더 강렬하게 끌렸습니다. 그래서 동숭교회 안에 14처를 구상해보게 되었고 나아가 인생의 14처라는 일상의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소연 큐레이터의 전시 소개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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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udge tells Jesus that he will die <1. Surrender 내맡기심>


조심스레 순례의 여정을 시작해본다.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제 1처는 교회 내 옹달샘 도서관 마당에 설치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마태복음 26:57)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태복음 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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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meets his mother <4. No Words 아무말 없으심>


제 4처는 1층 로비 기둥에 마련되었다. 이곳에 서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 걸음을 멈추시는 모습을 묵상한다. 말없이 다독이는 어머니의 손. 그리고 예수의 손. 아무 말 없이도 전해지는 슬픔과 온기, 위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치 칼로 마음을 찌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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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Simon helps Jesus carry his cross <5. Unison 일치>


"... 마침 알렉센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마가복음 15:21)" 자처한 것이 아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이다. 그런데 그림 속의 두 사람은(예수와 시몬) 친밀한 동료, 혹은 형제 같이 보인다. 짓누르는 무게를 똑같이 나누어 가지려고 허리를 감싸며 몸을 밀착한 모습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고통에 내 어깨를 온전히 빌려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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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2-3층 계단에 새겨진 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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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falls a second time <7. With Us 우리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지셨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군 모습에서 지독한 피로감이 전달되어 온다. 오른쪽의 보라색 옷을 입은 사람을 보자. 모두 십자가를 지고 있는데 혼자 가뿐한 모습으로 있다. 이 모든 상황이 신기하다는 듯, 혹은 경이롭다는 듯 예수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표정이 낯설지 않다. 영락없는 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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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falls a third time <9. Amen! 아멘!>


제 9처에서 만나볼 수 있는 그림은 "Jeses falls a third time"이다. 보고 있노라면 숨이 턱 하니 막혀온다. 가혹하고 무자비하다. 예수의 짓눌린 머리와 수평 구조를 이루며 떠오르는 달... 신은 다만 지켜보고 있는가?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예레미야애가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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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lothes are taken away <10. Whose? 누구의 것?>


제 10처는 1층 로비에 자리하고 있다. 갖은 고생 끝에 다다른 골고다 언덕. 로마 군인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고 조롱한다. 네 곳으로 잡아당겨 찢긴 옷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형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피로 물든 깃발을 높이 든 흑인이 앞으로 나아온다. 수치와 모욕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어떤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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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dies on the cross <12. Holocaust 희생제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다. 희생제물의 모습이다. 사람이기 보다는 차라리 고깃덩어리에 가까운... 두렵고 끔찍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제 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 27:46)" 이제는 끝이 났다. 세 번이나 넘어지고, 옷 벗김을 당하고, 못 박혀 십자가에 매달린 채 흘러간 고통의 시간...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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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is laid in his mother's arms <13. Maternal Womb 모태>


제 13처에서 만난 그림은 오래도록 가슴을 친다. 예수의 시신이 십자가에 내려지는 모습을 묵상한다. 하얗게 차가워진 몸이 말한다.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아들을 껴안은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지만, 그 너머에 있는 평안함에 집중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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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is buried <14. Chrysalis 번데기>



Alive ! 살아계시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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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교회의 까페 에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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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에서 운영하고 있는 카페 '에쯔'이다. 이곳에서 교인들이 직접 따라 그리고 채색한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림과 함께 개개인이 묵상한 글들을 읽을 수 있어서 더욱 뜻깊다. 보고 있노라면 힘이 난다. 묵상한 것을 삶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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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그림묵상 기도집. 교회 사무실과 에쯔 카페에서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비아돌로로사 : 십자가의 길 14처를 순례하는 데에는 그림 묵상집의 도움이 컸다. 묵상집에는 각 처소 소개, 묵상 방법, 관련 성구, 묵상기도와 지거 쾨더의 명화들이 실려있다. 글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순례자가 되어 깊은 묵상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묵상집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Alive! 살아계시네!'이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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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열정과 수난의 상징.


십자가의 길 14처의 끝에는 부활의 메세지가 있다. 찬란한 빛이다. 죽음에서 솟구친 빛이기에 더욱 강렬하다. 하지만 너무나도 자주 그 빛을 외면하고 잃어버리며 살아가곤 한다. 어두운 무덤가에서 예수를 찾는 일.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냥 주저앉는 일... 나의 삶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느낄 때, 눈을 들어 보면 십자가가 앞에 있다. 열정이다. 세상을 향한 불가해한 사랑이다. 사랑이었기에 괴로웠고 사랑이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노라고, 언젠가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고난 주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걸은 그 길, 십자가의 길을 깊이 묵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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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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