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신병, 혹은 신적 환희 : 연극 "에쿠우스"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4.0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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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서 극 내용이 등장합니다.


정신과 의사가 아동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내용. 겉으로만 본 연극은 이 한 줄로 요약된다. 하지만 직접 연극을 보면 절대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는 연극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연극이 끝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금세 수십 줄로 늘어난다. 한 배우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이 연극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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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거리가 많은 연극이다. 그래서 다소 무겁고, 조금은 힘든 연극일 수도 있다. 처음 이 연극을 보고 나서는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생각의 혼란 속에서 몇몇 장면들의 강렬한 인상만 남고 나머지들은 무의식 저편으로 흘려보내버렸다. 1년 쯤 후 다시 이 연극을 보고 나서야 그 혼란 속에서 생각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런 김에 이 연극이 던지는 ‘생각할 거리’들을 여기에 정리해 보려 한다. 같은 연극을 잊지 못해 2번 보고, 또 공연이 올라가면 계속 보러 갈, 이 오래된 연극의 조용한 팬이 기록하는 개인적인 감상이다. 물론 연극을 보는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전율은 이 글자들에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도 알지만 말이다.



1. 신(神) : 종교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신을 창조하다


이 극에는 다양한 종교관들이 등장한다. 알런의 엄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아빠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무신론자이며, 알런을 치료하는 다이사트 박사는 마음 한 켠에서 헬라스 신화를 동경하는 사람이다. 알런은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성경 얘기를 들으면서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가치관 속에서 성장하지만, 그가 믿는 신은 예수가 아니다. 알런은 종교들의 경계와 충돌 안에서 자신만의 신, 에쿠우스를 믿는다.

신 에쿠우스는 알런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들은 성경 속 말에 관련된 이야기와 해변가에서 처음으로 만난 말의 이미지, 그리고 자신의 성장 배경인 기독교적 유일신 개념을 무의식적으로 조합해 에쿠우스를 만들어낸다. 종교적 상식에 따르면 전능하신 신이 나를 창조하면 했지 내가 감히 신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알런은 자신만의 신을, 나아가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한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그가 의도친 않았지만 부모의 과잉보호로 인해 세간 사람들과 차단되어 어린이다운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알런은 17세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이 같은 면이 있다. 특히나 에쿠우스에 대한 태도나 행동에서 특유의 순수함이 빚어낸 환상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선 남들은 가축으로 여기는 말에 신격(神格)을 부여한 것부터가 그렇다. 그래서 알런은 주위에서 아무리 말을 타보라고 해도 절대 타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멋진 승마복을 입고 승마를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알런에게 말은 숭고한 신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알런이 밤에 남들 몰래 말을 타는 과정은 마치 하나의 종교의식과도 같이 신성하다. 말을 타기 전에는 언제나 경외감에 찬 손길로 말을 애무하고, 예수의 최후의 만찬처럼 말에게 설탕을 먹이는 등 그 나름의 의식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감은 어느 종교나 그렇듯이 에쿠우스의 신성(神性)을 이루는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그리고 사회는 이 순수함과 신비감의 혼합체를 정신병이라 부른다. 이 극이 비판하는 중심 대상이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정상사회’는 알런 내면의 고유한 신비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거세하려든다. 이는 다이사트 박사의 깊은 회의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정신병 환자라며 병원에 보내진 아이들이 가진 고유한 순수함을 죽이고 그들을 정상사회에 편입시키는 자신의 직업에 혐오를 느낀다. 그의 혐오는 도대체 정상이 무엇인지, 정상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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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性) : 성장과 금기의 충돌


신과 함께 이 극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코드는 바로 성(性)이다. 이는 알런의 나이가 열일곱살이라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7세, 또래 아이들은 벌써 성을 알 나이이지만 세상과 단절된 알런에게는 오직 어머니가 철저히 기독교적 관점으로 주입한 성의식밖에 없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이미 성숙한 알런의 성에 대한 본능은 폭발하고 있었다.

이 극에서 성은 어른들이 규정한 금기의 대상이자 동시에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목이라는 이중의 상징을 지닌다. 알런이 마구간에서 일하던 친구 질과 함께 성인영화를 보러 가는 장면에서 이러한 상징이 잘 드러난다. 성인영화를 보러 간 알런과 아버지가 극장에서 서로를 들키게 되는데, 자신을 혼내기는커녕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머니와 자신에게는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대고 밤마다 나가서 성인영화를 봤다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런이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 부모 혹은 어른이라는 존재의 치부를 목격하면서, 알런의 마음속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굳건한 위엄이 깨지게 된다. 이 장면 뒤에 이어지는, 하늘같은 신 에쿠우스의 눈을 찌르고 죽이는 장면도 어쩌면 앞의 이 장면에서 암시되는 금기의 파괴 혹은 능가와 관련성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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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정 : 신과 한 몸 되다


여기서는 장면 분석을 시도해보겠다. 바로 극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1부 마지막 장면이다. 알런은 밤에 아무도 모르게 마구간으로 가 그가 사랑하는 너제트라는 말을 타고 해변가를 질주한다. 알런이 에쿠우스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말과 한 몸이 됨’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우선 알런이 이런 아이디어를 얻는 곳은 역시 어머니가 말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이다. 원시인들은 말을 탄 정복자들을 보고서 말과 인간이 한 몸인 반인반마라고 생각했다는 건데, 이러한 원시인들의 무지와 환상에 대한 이야기는 알런에게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변용된다.

신(神)의 축에서 보면, 신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환희의 절정이다. 신이 내게 내려와 내 안에 신을 모시게 되고, 부르심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 등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체험이 극대화된 것이다. 한편 성(性)의 축으로 보면, 한 몸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섹스를 의미한다. 알런이 한창 성에 폭발적인 관심을 갖는 나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말을 타고 질주할 때에도 점점 거칠어지는 알런의 숨소리와 비명은 단순히 말을 타고 달리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에서 관객을 가장 압도하는 순간은, 광란의 질주와 비명이 점차 사그라들고 난 뒤 적막 속에서, 알런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같은 자세로 말 위에 앉아 내뱉는 “아멘”, 이다. 신과 성의 합일이다. 누군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단이고 누군가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광기이며 누군가에게는 한낱 정신병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알런에게는 그의 열정이자 생(生)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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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신병을 잃어버린 사람들


순수함을 토대로 한 신적 신비감과 본능적인 성이 에쿠우스를 통해 합일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알런이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어른이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부터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수많은 금기를 학습하고 사회화 과정을 겪으며, 이 ‘정상사회’의 명령을 따라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스로의 고유함을 죽여버렸다. 교육이라 불리는 그것에 의해 우리 모두는 고유의 정신병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알런만은 자신의 광기 혹은 생의 열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알런과 대비되며 알런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부각시키는 인물은 다름 아닌 다이사트 박사이다. 그는 알런을 치료하는 아동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안정적인 직업과 일상을 가졌고, 5년 동안 손 한번 안 잡은 것 빼고는 큰 문제없는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혐오하는데, 직업적 회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이 열정 하나 없이 끔찍하게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여행 중 단 하룻밤 지냈던 헬라스(그리스)의 어느 섬을 잊지 못하며 끊임없이 헬라스 신화를 동경한다. 하지만 현실은 매일같이 출근하고, 아이들의 고유함을 한결 더 죽여 놓은 뒤, 퇴근하면 이제는 남보다 멀어진 아내와 아무 대화 없이 마주 앉아 미술첩을 뒤적거리는 것 뿐이다. 자기가 그러는 동안 신 에쿠우스와 한 몸이 되어 해안을 달리던 알런이 가진 열정과 숭배감을 다이사트는 몹시 부러워한다.


그게 고발이라는 거예요.
그의 눈총이 늘 내게 말하고 있는 게
바로 그거랍니다.

"적어도 난 달려봤어.
그런데 넌 해본 일이 있냐?" 

솔직히 난 샘이나요.
알런이 부럽다우.


이런 다이사트는 순수함을 죽인 채 현실에 맞춰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드러내지 못하는 정열을 가진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이사트 박사처럼 자신의 고유함을 죽이고, 어쩌면 타인의 고유함도 죽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열망과 광기를 뿜어내는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몰래 동경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조건적으로 알런을 옹호하거나, 다이사트가 알런처럼 바뀌어야 한다고 답을 내리지 않는다. 광기와 정상 사이 그 혼돈 속에서 우리가 직접 각자의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5. 신의 파괴



에쿠우스, 고귀한 에쿠우스-. 
성실하고 참된 신의 종.
그대 신은 
이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알런의 자유분방한 세계를 지켜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알런은 말들의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파괴해버리기 때문이다. 스스로 창조한 신이니 스스로 파괴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가능하기는 하다. 그리고 애초에 이 극의 배경이 된 실화가 말의 눈을 찌르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의 전도는 어쩌면 필연적이다. 내용상으로도 크게 어색하진 않은데, 신전과도 같은 마구간에서 친구 질과 섹스를 하던 알런이 신의 시선에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말의 눈을 찌른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말이 알런의 신이었다면 그들에게 잘못을 빌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말을 죽이는 전개는 조금 이상하다. 더군다나 극 전반에서 알런의 순수함과 광기를 찬양하는 듯했는데 끝에 가서 이런 식으로 내용이 전도되는 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눈을 찌르기 전 “이제 그만”이라는 알런의 말에서 느껴지듯 스스로 만들어 낸 세계에 지쳐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부모의 품과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이야기처럼 자신의 신, 수호자, 세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의 성 본능을 억압하는 신에게 대항함으로써 아이의 신적 세계에서 어른의 성적 세계로 이행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알런이 자신의 신을 파괴한 뒤 시달리는 고통과 악몽, 그리고 결국 다이사트 박사에 의해 치료되고 ‘정상 사회’로 보내짐을 암시하는 결말은 알런의 행동을 단순히 자기파괴에 의한 인간의 성장이라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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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30일 공연 커튼콜 중
 




기분에도 무게가 있다면 이 연극은 아주 무거운 기분을 다루고 있다. 알런이 가진 광기는 한없이 무겁다. 무거움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성찰을 낳는다. 볼 때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달라지는 연극이다. 물론 볼 때마다 알런이 내게 던지는 질문 하나는 같다.

너는 한 번이라도
네 온 몸을 던져 달려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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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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