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목소리를 마주할 용기 -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

글 입력 2018.04.06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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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덩그라니 선 여자는 거칠게 갈라진 음성으로 외친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무대 위를 가득 채운 새빨간 빛이 점멸을 반복한다. 괴기하게 일그러지는 검은 그림자 사이 여자는 힘 빠진 다리를 휘청되며 뒤편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자리 바르르 떨고 있는 한 남자가 나타나 조용히 읇조린다. "여기, 사람이 떨어졌어요…." 남자가 말을 마친 순간 무대는 칠흙같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귀를 찌르는 소리가 시작된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짧은 텀을 두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화벨 소리가 침잠한 어둠 속을 가른다. 소리는 점점 커진다. 그 무엇도 없는 듯 한 어두운 무대는 사실 고막을 찢는 전화벨 소리로 가득 찼다.

아직도 쟁쟁거리는 전화벨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하나하나 공감가는 극 중 캐릭터들, 이를 뒷받침하는 풍부한 연기력, 현실을 보는 듯한 실감나는 설정 등 모든 요소가 연극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는 콜센터에서 일하는 감정 노동자의 삶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단순히 감정 노동자의 애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 내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동시에 본질적인 자아를 잃어가는 개인의 내적 갈등을 심도 깊게 풀어낸다. 상징적 요소를 드라마틱하게 사용하고 무대 위 인물들의 상황을 절묘하게 교차시킴으로써, 잘 짜인 실타래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콜센터 상담원 수진은 꾸준히 이 직장에서 일해왔지만 스트레스가 커질 뿐 일에 익숙해지고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콜센터 직원을 마치 감정 쓰레기통인 양 대하며 화풀이하고 욕하는 수많은 전화들을 그녀는 도저히 웃으면서 응대할 수 없다. 그러던 중 전화가 꺼진 줄 알고 고객에게 툭 욕을 해버린 날, 그녀는 고시원 옆방에 사는 배우 민규를 우연히 만나 그에게 웃는 법을 알려달라 청한다. 오이디푸스 연기를 하면서 울다가, 웃다가 감정을 넘나드는 그를 보곤 단지 자신은 무작정 웃는 법만 배우면 된다고 한다. 민규는 연기란 그런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함으로써 우러나오는 것이라 설명하지만, 수진은 그의 말을 곧이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렇게 시작된 개인 강습은 쭉 이어져, 웃는 얼굴이 어색했던 수진은 이제 그 어떤 전화를 받더라도 말갛게 웃는 낯으로 고객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진다. 지금까지 팀 내 일등 직원으로 꼽히던 동료가 옥상에서 투신을 하고 만 것. 사실 그 어떤 상황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롭게 대처하던 그녀에게서 많은 자극을 받았던 수진은 그녀의 선택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옥상에서 민규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수진은 웃는 연습을 처음 할 때 했던 것처럼 안대를 쓰고 우두커니 서 있다. 민규는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며 그녀의 주위를 돈다. 견디기 힘든 진실을 감내하고 듣기 위해 스스로 눈을 찔렀던 오이디푸스의 독백을 들으며, 그녀는 쓰고 있던 안대를 푸른 채 앞으로 한발짝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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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흡입력이 강한 연극이었다. 객석에 자리한 관람객들은 모두 수진이 겪는 마음의 궤적을 따라가며 연극을 지켜보게 된다. 불쑥 치미는 아픈 감정을 참고 견뎌야 했던 그녀는 결국 단순한 해결책을 갈구하게 되었다. 진정으로 웃는 마음은 필요 없다. 단지 웃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만 있으면 된다. 나에게 욕을 던지는 상대에게 웃으며 응대할 수 있는 가면을 그녀는 원했다. 하지만 쉬운 길은 그만큼 위험도 큰 법.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이에게 날선 말을 스스럼없이 뱉고, 자신의 권리를 타인의 것 위에 두는 등, 고객들이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괴물 같은 태도로 타인을 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니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감을 인지할 수 없었을 터.

또한 더 큰 문제 상황은 그녀의 옆자리 동료의 모습을 통해 표출된다. 늘 도자기처럼 말갛게 변함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던 동료는 사실 그 누구보다 문드러진 속을 안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수화기만 들면 들려오는 날선 말들의 태풍 속에서 벗어나 행복하고자 선택한 가면이었지만, 그 결말은 누구보다 비참했다.  무대 위를 가득 채우던 붉은 빛 속에서 그녀는 외쳤었다. 나는 정말 내가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내 안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연극은 이런 수진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보여주면서 또 다른 해결책을 조심스레 제시한다. 삶과의 부대낌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내적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 방향은 배우 민규의 행동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얘기한다. 연기란 단순히 가장하고 꾸며내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민규와 수진의 웃음은 겉으로 봤을 때 같은 웃음일지 모르지만 그 뿌리가 다르다. 꽃인 척 하는 웃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연극은 오이디푸스라는 캐릭터를 상징적으로 등장시키는데, 극 중 인물과 아이러니컬한 오버랩을 이뤄 흥미롭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제 눈을 찔렀으나 진실을 마주했다. 나 자신을 바로 보는 용기도 이와 같다. 투쟁, 싸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나 이를 거치고 난 후에야 한결 오롯이 드러난 내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맨 마음으로 웃는 미소는 설령 아플지언정, 신경을 타고 전해지는 통각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답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겪은 후 수진의 미묘한 태도 변화를 통해 암시할 뿐이다. 동료의 자살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창백한 푸른 빛 속에서 검은 안대를 썼다. 동료와 같은 방법으로 삶을 견디고자 했던 수진은 그 소식을 자신과 동일시했을 것이다. 내면의 죽음을 경고하는 듯 푸른 빛을 온 몸에 둘렀으나 수진은 결국 안대를 푸르고 한 발짝 내딛는다. 그 한 발짝. 연극은 그 한 발짝을 보여줄 따름이다. 또한 배우 민규와 콜센터 직원 수진의 삶의 태도를 대비하되 실제 현실 속에서 당장 얻어진 결과 역시 대비한다는 점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 진정한 연기를 위해 노력하며 꿈을 좇던 민규는 결국 오디션에 떨어진 반면, 웃음 가면을 쓴 수진은 직장 내 우수 사원에 선정된다.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으로 하여금 조용히 지켜보게 만든다. 그리고 무대의 막이 내린 후 각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콜센터 직원의 감정노동만을 다루는가 싶었지만 인간 공통의 본질적인 고민과 문제를 예리하게 짚어낸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 지금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애환을 그려내면서 앞으로 나아갈 삶의 방향을 함께 고민한다. 삶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부터 새롭게 길을 튼다. 나의 웃음은 과연 진실되었는가. 혹은 나의 슬픔은 과연 거짓이 아닌가. 진정으로 웃는 스스로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동인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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