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꽁의 소견] 그 사람은, 왜 이렇게나 오래도록 회자되는가

오래도록 회자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
글 입력 2018.04.1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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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

- 그의 유서 중에서


 감정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지 15년이 흘렀다. 하지만, 어디에선가는 계속 그리고 줄곧, 그의 영화가 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신기한 일이다. 15년 전의 타국의 사람의 노래와 영화가 이 곳에도 이리도 오래도록 울려퍼지니. 당년정과 영웅본색. 이것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듣기만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무언가가 아닌가. 또 그만큼, 그 작품과 그가 남기고 떠난 무언가만큼, 그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회자되고 기억되고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이번 4월 1일, 온 곳이 거짓말과 장난들로 점철되던 그 날에도, 어딘가에서 꽤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우울과 슬픔을 느꼈다. 장국영,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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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Leslie cheung, 張國榮)
1956.09.12 ~ 2002.04.01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토록 오래, 그리고 짙고 깊게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민꽁의 소견>에서는 그 이유에 관해 고찰하고 이야기한다. 아마 이 이야기는, 그를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또 그에 관해 들어는 봤지만 잘 알지 못했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사실 이 글의 시작은, 꽤 개인적이긴 했다. 필자는 그에게, 지독하게나 오래 그리고 깊이 사로잡혀있는 누군가다. 그래서 첫 '소견'의 대상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글 혹은 질문이, 꽤 의미를 가질 것은, 그 대상 '장국영'이라는 사람이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누군가이기도 하며, 꽤 의미있는 날들을 살다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사랑받고 기억되는 것엔 이유가 있다. 또 그 이유가 꽤 의미가 있다면, 그 누군가에 대해 알아두어도 나쁠 것이 없다.

 아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필자의 문체가 조금 뜨거워지고 들뜨더라도 조금은 양해해주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이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설레고 또 어쩔수 없이 들뜨는 일이 아닌가.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나 오래 회자되는가."


글의 내용은 주로
영화배우로서의 그의 모습에 기반합니다.



그 이유에 관하여



01.
우리는 아픈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 우리는 아픈 사람을 좋아해왔다.

 우리는 아픈 누군가의 말과 무언가, 그리고 그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았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마음을 잘 안다고, 우리를 제일 잘 위로해주던 사람은 지금까지 ‘제일, 아픈’ 사람이었다. 상처에 우울에 약이 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의 ‘괜찮아’가 아닌 아팠던 사람의 ‘이해해’인 법이다. 우리가 사랑해왔던 이상과 고흐는 모두, 조금씩 아픈 사람들이 아니었나. 그런 점에서 그 사람의 눈과 연기, 존재는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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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번 땅에 내려앉는 데
그건 바로 죽을때지"

- <아비정전>, 아비의 대사 중에서


 아비정전에서, 땅에 닿는 순간은 오직 죽는 순간일 ‘날개 없는 새’로 빗대어지던 그의 모습은, 휘청거리고 위태롭고 기댈 곳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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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 떠난 아휘의 담요를 안고 우는 보영(장국영 역)


 또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그의 모습은, 떠난 애인을 그리워하며 담요를 끌어안고 우는 그의 연기는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아픈 것이었다. 또, 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눈빛을 '위태로운', '아픈', '외로운' 등의 수식어로 표현하고 있지 않나. 그의 연기는 그리고 그는, 꽤 아파보이는 사람이었다. 또 그의 아픔에서,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발견하고, 공감하고, 또 위로받곤 했다.

 이렇게, 아픈 사람에겐 마음이 간다. 자신과 같아서, 혹은 돌보아주고 싶어서, 혹은 그 아픔이 궁금해서. 그 시작이 무엇이든, 누군가의 아픔은 꽤 지독하고 마음에 깊게 남는 무언가가 있다.


02.
우리는 예술가를 사랑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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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의 <해피투게더>


 앞서 언급했지만, <해피투게더>라는 영화가 있더랬다. 파격적이게도 주인공들의 동성연애가 주가 되는 영화였는데, 그 두 주인공은 바로 양조위와 장국영이었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꽤 그 두 주인공들이 그 배우들 자체의 모습과 많이 흡사하고 닮아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장국영이, 양조위와 자신을 비교하며 한 말이다.


“양조위는 감독이 40번 연기를 시키면
똑같은 연기를 40번을 했다.
나는 그렇게 못한다.
40번을 시키면 나는 40번이 다 다르다.
그래도 다 말은 된다더라”

- 장국영


 영화 속에서, 양조위는 장국영 역을 기다리고, 혹은 떠돌다 온 그를 받아주고, 또 일상의 삶을 살았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꽤 안정적이고, 일상과의 균형이 잡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장국영 역은 달랐다. 양조위에게 쉽게 실증을 느끼고, 벗어나고 싶어했으며, 어딘가를 전전하고 떠도는 삶을 살았다. 보다 본능적이었고, 예민했으며 충동적이었다. 놀랍게도, 앞선 말 속의 두 배우의 성격과 매우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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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과 양조위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라는 저서에는, '아폴론적'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예술엔 두가지 경향이 있는데 '아폴론적'인 경향은 균형과 안정 혹은 조화의 범위라는 것이다.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은 그 이름 자체가 '술의 신'의 것인 만큼, 더 본능적이고 파격적이며, 가끔은 충동적인 성격이다. 니체는 이 두가지 성격이 조화를 이루어야 좋은 예술이 된다고 했다.

 굳이 두 인물을 니체의 미학이론 속에 넣어 비교해보자면, 양조위는 아폴론적 경향을 띄는 사람에, 장국영은 디오니소스적 경향을 띄는 인물에 가깝다.<해피투게더> 속 양조위가 맡았던 아비는 '아폴론적' 인물에 가까웠다. 꾸준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일상의 삶, 혹은 조금은 심심한 날들을 살았다. 하지만, 장국영 역의 아휘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아비(양조위 역)를 지겨워하고, 다른 애인을 만들고, 또 지겨워지면 돌아왔다. 그는 그의 본능과 충동대로 살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그렇게 대단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은, 니체가 말했던대로 두 경향이 잘 어울어지고 조화를 이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서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꽤 파격적이고 본능적인 무언가였다. 언제나 이성을 바라는 이 세계에서의 우리는, 반대의 '본능적'이고 비균형적인 것에 더 끌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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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에서의 장국영


 일상적이고 균형잡힌 것을 바라고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본능적인 것을 혹은 충동적인 것을 선망한다. 그런 점에서 장국영은, 그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이었다. 남자가 머리를 기르면 안된다는 통념이 일반적이던 그는, 콘서트에서 장발의 스타일로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 또 혹은 <패왕별희>에서 그는 너무나도 일반과 반대되는, 그야말로 극강의 '예술가'를 연기했다. 예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는, 무섭고도 비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은 꽤 장국영과도 닮았다.

 우리는 그래서 장국영을 사랑해왔다. 못말리는 예술가였어서, 또 우리가 못하고 못할 것을 '하는' 사람이었어서. 우리는 파격을, 충동을, 혹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03.
세상을 바꿀 용기에 관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엔 꽤 맞지 않는 것이 많다. 인식이라던지, 습관이라던지, 고치고 고쳐왔는데, '이제는 이데아의 모습이다'라고 말하기엔 아직은 문제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해야할 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말하는 일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나.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몇 달 동안이나 베스트셀러 목록에 '미움받을 용기'가 이름을 올린 것 처럼,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옳은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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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우)과 그의 마지막 애인, 당학덕(좌)


 그런 세상에서, 장국영은 조금 다른 인물이었다. 옳은 것을 말하는 데에,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정부가 저지른, '천안문 사건'에 관해 공인의 목소리로 그들을 비판하였으며, 또 그로 인해 중국 정부에게 꽤 많은 압박을 받았다. 또, 그는 '이성간의 사랑'만 인정하는 세계에서 그의 애인 당학덕을 드러냈다. 콘서트에서, 그를 'my lover'이라고 소개하며 말이다. 스윗하고도 용기있었다.

 그런 그의 행동은, 개인적이지만 사회적이었다. 모두가 천안문 사건에 관해 쉬쉬하고 입을 다물 때 그는, 목소리를 냈고, 또 이성간의 사랑만 존중하는 세상에서, 동성의 연애에 관해 알렸다. 또 그 행동들은 모두 세상을 조금은 더 이데아적이고, 이상적이고, 또 다양성을 인정하는 곳으로 살짝은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꽤 '미움받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쓸모 없는 용기가 아니라, 세상을 좀 더 밝은 곳으로 좀 더 옳은 곳으로 변화시킬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좋은 것을 남겨서 혹은, 특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가 꽤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금은 바꿀만한 용기'를 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작은 거인은, 꽤 기억될 필요 혹은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마치며

 지금까지 한 인물에 관해 이야기 해보았다. 그가 사랑받는 이유와, 또 조금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전하는 필자는 들뜨고 뜨거워지는 마음을 달래고 다독이며 괴로웠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아직도 사랑받는다. 그 이유는 아마, 우리가 아픈 사람을 사랑하기때문에, 우리는 예술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혹은 그가 세상을 바꿀만한 용기가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 못받을 사람은 없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도 의미나 무언가가 기억될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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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그가 이 세상을 떠난지 15년이 되는 올해, 매년 4월 1일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올해로 끝을 맺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사람이 몸을 던진 호텔 앞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며 그가 뛰어내린 시간 모두 모여 기도를 하는 그 추모식이 이제는 끝을 맺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올해의 필자는, 그 날 그 시간 그 호텔 앞에 서있었다.

 한 사람의 '팬'으로서, 혹은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옛날 사람이 조금 더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이 글은 그래서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어떻게 읽혔을 지 모르겠다. 그저 한 명의 그를 애정하는 사람이 그에 관해 소개하는 이야기로 읽혔을 지, 혹은 글쓴이의 마음의 온도가 높디높은 '영업글'로 읽혔을지.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글의 대상이 되었던 '장국영'이라는 인물은, 혹은 사람은 그래도 괜찮은 누군가였으니까. 물론 이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 아닐 것은, 아직도 그를 바라보고 그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좋아하고 아끼는 데엔 이유가 있다.

 이 글의 끝에서 당신께, 필자는 다음의 글에선 조금 더 담백하고 미지근한 온도의 이야기로 찾아뵐 것을 약속 드린다. 많이 부족한 첫번째, '소견'을 묵묵히, 그리고 끝까지 눈에 담아주셨음에 감사드린다. 아참, 또 이 글을 통해 그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하나 하나 영화부터 찾아봐보시길.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 <패왕별희>를 추천드린다. 하지만 이건 여담이지만, 필자의 입덕 영화는 <성월동화>였다. 관심 없으시다면 죄송하다.


[손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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