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이디푸스여, 운명마저 내 책임인가요 [문학]

글 입력 2018.04.1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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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이라고 하면 고전 특유의 어렵고 재미없는 분위기를 풍길 것만 같은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어쩌면 현대문학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읽힌다고 자신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신화가 우리에게 친숙하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겠지만, 읽다보면 왜 이 작품이 그리스 최고의 비극이라 칭해지는지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오이디푸스가 살인범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과도 같다. 그러다 밝혀지는 반전과 진실,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이 암시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지점들이 많다. 그 생각들을 풀어놓기 전에 우선 작품 내용부터 간단히 훑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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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edipus and the Sphinx,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1808-1827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강대국 테베(테바이)의 왕이 된 지혜로운 오이디푸스. 그는 본래 코린토스의 왕자로 성장했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그곳을 떠나 방랑하던 중 테베에 가 왕이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방인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훌륭한 통치를 펼쳐 테베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다. 어느 날 이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고, 신탁에 따르면 테베의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찾아야 역병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는 범인을 찾고자 예언자와 증인들을 모아 이야기를 듣지만, 결국 그가 알아낸 것은 라이오스의 살인범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며, 더군다나 자신의 진짜 아버지가 바로 자기 손으로 죽인 선왕 라이오스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인 테베의 왕비 이오케스테는 선왕 라이오스의 아내였기도 하기에, 자신의 아내가 곧 자신의 어머니라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토록 피하려 했지만 결국 이루어진 신탁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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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lind Oedipus commending his children to the Gods, Bénigne Gagneraux, 1784
 


도대체 왜 오이디푸스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질문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인과응보에 기초한 우리의 정의관에 따르면, 아무 잘못 없는 오이디푸스가 이러한 비극을 겪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람을 죽인 대가라기에는 신탁이 너무나 가혹하고, 아버지를 죽이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모르고 저지른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지혜로 테베 시민들을 괴롭히던 스핑크스를 몰아내고 그 나라의 왕이 된 훌륭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 끔찍한 비극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비극에 어떠한 형태로든 이유와 설명을 부여하려 한다.



운명론 : 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태어날 때부터 오이디푸스는 비극을 겪을 운명이었고, 그 운명은 그가 아무리 피하려 노력한다 해도 절대 피할 수 없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곧 인간의 운명이 실재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이 작품 역시 그토록 지혜로운 오이디푸스마저 굴복시키는 운명의 무서운 힘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운명론적인 해석이 완전히 타당하지는 않음을 보여주는 점들이 몇 가지 있다.

1) 운명의 자기충족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당사자들에게 말해졌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부친 라이오스는 아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들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를 내다 버렸고, 그로 인해 오이디푸스가 스스로의 출생에 대해 무지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오이디푸스 역시 신탁을 들었기 때문에 굳이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하다가 자신의 운명을 실현시킬 테베로 들어온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신탁을 듣지 않았더라면, 즉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지했더라면 그 운명이 실현되었을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2) 오이디푸스의 자기단죄
작가 소포클레스도 운명론적인 관점으로만 이 작품을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 장면이기도 한데,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는 부분이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 분이시오.
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은.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분명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었음에도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단죄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 의아하다.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련 없는 운명이라면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나의 운명까지도 내 삶의 일부인 이상 나의 책임이라는 것인가. 삶에서 ‘어찌할 수 없음’과 ‘어찌할 수 있음’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책임론 : 그의 무지가 곧 그의 잘못이다


한편 운명론과는 정반대로 해석하는 책임론도 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그의 운명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 비극의 책임이 실은 그의 무지에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자기위안일 뿐이라는 해석이다. 알아도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으며, 자신의 신탁만 알고 신탁을 피할 구체적인 방법까지는 몰랐던 오이디푸스의 충분치 않은 지혜가 비극의 원인이다. 그토록 지혜로운 오이디푸스였지만 정작 자기가 누구를 죽였으며 누구와 결혼한 것인지, 스스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이러한 무지가 자기 자신을 비극에 빠뜨린 것이다.

모든 상황이 오이디푸스의 책임이라는 이 주장을 뒤집어보면, 오이디푸스가 조금만 더 현명하고 신중했더라면 이 비극을 빗겨갈 수도 있었다는 낙관론적인 주장이 된다. 즉 나와 무관하게 미리 결정되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없으며, 모든 상황은 얼마든지 그와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릴 때, 이를 상황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려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거나, 그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머리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지 못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어찌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운명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무지하거나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충분한 노력을 통해 무지와 무능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내 통제 아래 둘 수 없는 상황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론이 가진 난점은, 인간의 책임을 과대평가함으로써 이 세상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의 존재를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으며, 원하지 않아도 늙어가고,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도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며, 따라서 미래에 대한 완전한 대비도 불가능하다. 보다 와 닿는 예시로는,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해주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상대의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면 모든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어리석으며, 얕은 지혜의 오만일 뿐이다.



무의미론 : 원래 세상은 불합리하다?


책임이냐 운명이냐, 바꿀 수 있었냐 없었냐. 머리 아픈 문제이지만 이미 비극이 일어난 시점에서 이 문제는 사실 별 쓸모가 없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비극에 너무나도 무력하게 굴복된 사람은 결국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 이 비극에는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없다. 원래 세상은 비극이며 불합리이며 모순투성이라는 낭만적 비관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그 내용만큼 그 자신도 무의미하다. 물론 현실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극과 희극에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운명의 수용이든 노력을 통한 극복이든 어떻게든 대응하려는 것이 인간의 존재 방식일 것이다.


내용참고
“그리스 비극 걸작선” 중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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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톱워치
    • 김해랑 에디터님! 글 잘 읽었어요 ㅎㅎ 대학교 수업 시간 때 잠시 배웠던 "오이디푸스"가 다시 떠올랐어요. 저는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를 통해 인간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에게 내려진 비극적인 신탁처럼, 운명지어진 삶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 성실히 그 운명에 저항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처럼, 그리고 페스트에서 장 타루나 베르나르 리유가 그런 것 처럼요. 사람들은 제각기의 신탁을 마음에 지고 살아가요. 그러한 신탁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바는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삶이 진행될 수록, 우리는 죽음이라는 신탁에 가까이 갈 수 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죽음이 있기에 인간이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한하지 않은 삶, 말 그대로 그냥 잠시 나에게 던져진 그 시간은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지만, 그 곳에 자꾸 흠집을 내고, 무언가를 새기며 '나의 인생'을 새기는 게 인간이고, 그 자체가 인간 조건 아닐까요? 소포클레스도 이걸 잘 알았기에,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게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는, 적어도 저에게는, 너무나 막연해요. 마치 봄의 혼탁한 미세먼지 속에서 한 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느낌이랄까.. 조금만 먼 곳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현기증이 나고, 균형을 잡을 때는 안정적이지만, 조금만 균형이 흐트러져도 제 마음은 "나는 왜 살까?"라고 물어봐요.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 있겠지요? 아직 전 못 찾았지만 ㅋㅋㅋ 어쨌든 저는 그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럼으로써 제 인간 조건을 더듬어 가고 있어요. 에디터님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거겠지요.
       글 잘 읽었어요!! 그리고 직접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다른 연극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희곡을 단순히읽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와닿겠지요? 아참, 혹시 셰익스피어의 "멕베스"도 시간이 난다면, 읽어보세요.(보면 더 좋겠지만요.) 그것도 "오이디푸스"와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저에게는 두 희곡이 다른 의미로 와닿았었거든요. 오늘 하루도 마음 충만한 날이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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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랑
    • 2018.04.16 17: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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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톱워치댓글 감사합니다~ 던져진 시간에 흠집을 낸다는 말이 멋지네요. 그리고 저는 신탁이 단순히 고대 그리스의 낡은 유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궁극적으로 죽음을 상징할 수 있다는 게 신선한 해석인 것 같아요! 저도 카뮈 작품 읽으면서 죽음이라는 운명에 인간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고는 했어요. 저도 확답은 없지만, 삶이라는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잃을 때마다 저는 "태어난 김에 산다"는 제 친구가 던진 말을 떠올리고는 한답니다ㅋㅋ 결국 답은 아무도 정해주지 않고, 오로지 각자의 힘으로 내리는 거니까요!ㅎ 추천해주신 멕베스도 줄거리만 알고 직접 읽어보지는 않아서 이번 기회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그에 대해서도 오피니언을 쓰는 날이..?) 읽어주셔서 그리고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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