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음악]

글 입력 2018.04.1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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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336번 정도 될 것이다, 내가 그 주에만 아이유의 노래, ‘이름에게’를 들은 횟수는.

집에서 나와 이어폰을 귀에 꽂고, 기계처럼 무엇에 이끌리듯 이 곡을 재생하고, 걸어서 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하고 다시 걸어 내려가 회사로 향하는 길 내내 귀에는 ‘이름에게’가 울리고 있었다. 당시 왕복 약 4시간이 걸렸다. ‘이름에게’ 재생 시간은 정확히 4분 49초, 약 5분으로 치면 4시간 동안 이 곡은 약 48번 재생된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한 곡을 반복 재생하여 내처 들었으니 나는 이 노래를 336번 이상 들은 셈이었다.

어떻게 이 곡을 듣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몇 번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는 건 또렷이 기억난다. 까만 하늘에 작은 섬광이 비치듯 전주가 깔리고, 노래가 시작되고, 절정으로 치닫고, 하나뿐이었던 섬광이 무수히 많아져 하늘의 별처럼 빛나다가 한 순간에 스러지고, 끝나고, 기다리면 노래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래를 들어도 턱 막힌 가슴은 어째 풀어질 줄 몰랐다. 눈을 감으면 불현듯 피어오르는 어두운 코발트블루 색의 두터운 연기 속에 나는 누군가를 자꾸만 잃어버렸다.

*

‘이름에게’는 아이유 4집 앨범 ‘팔레트’의 더블 타이틀곡으로, 유명 작사가 김이나와 아이유가 공동으로 작사한 노래다. 아이유는 공식적으로 이 노래가 세월호 사건과 관련 있다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노래를 듣고 그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았다. 세월호 사건 3주기와 비슷한 시기에 앨범이 발매되었다는 점, 뱃고동 소리를 연상시키는 전주, 아이들을 추모하는 듯 한 가사 내용 때문이었다. 나 또한 이 노래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처음 듣자마자 직감적으로 세월호가 떠올랐기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공감하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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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견도 있다. 어떤 네티즌은 ‘끼워 맞추기 해석은 곡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아이유도 MBC MUSIC ‘피크닉 라이브 소풍’에서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는 만큼, 이 곡을 듣는 모두가 주인공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사를 썼다”고 밝혔다. 이 노래의 의미는 듣는 이에게 해석이 맡겨져야 옳다. 작년 말 멜론뮤직어워드(MMA)에서는 여러명의 무명 가수와 합동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이때 '이름에게'는 세월호 사건에 한정되지 않고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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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처음에는 그 사건을 떠올렸지만 반복해서 듣는 동안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잃어버린 이름의 무게를 깨닫고, 추억하고, 잊을 수 없는 이름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이름의 무게, 소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이름은 존재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이름을 명명하는 행위로 인해 불분명한 형체에 지나지 않는 ‘몸짓’이 향기와 색깔, 형체가 분명한 꽃으로 변화한다. 존재가 의미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올해 4월 한국에서 개봉한 <레이디버드>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사춘기 소녀는 자신의 원래 이름 대신 자기가 임의로 지은 이름을 공표하기 바쁘지만, 결국 고향과 부모의 소중함을 깨닫고 나서 다른이에게 자기 자신을 원래의 이름으로 소개하게 된다. 소녀가 이름을 부정했던 이유는 그 이름이 살았던 곳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이름은 사람의 역사를 압축해놓은 대명사이다. 그래서 이름은 존재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한편 김춘수 시 '꽃' 마지막 줄에서 이름을 받은 존재에게는 소원, 욕심, 혹은 목표가 생긴다는 사실이 새롭다. 바로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은 어떤 존재에게든 본능일수도, 자연스러운 바람일지도, 그래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알아’  



조용히 사라진 네 소원을 알아
영원히 사라진 네 소원을 알아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천천히 잊힌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름이 사라졌으니 이름이 가지고 있던 소원도 사라질 것이다, 조용히, 영원히.
 
그런데 ‘이름에게’ 화자는 세 가지를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순리와 같은 이 과정을 전복시킨다. 화자가 알고 있다고 말하는 세 가지는 ‘조용히 사라진 소원’, ‘영원히 사라진 소원’, ‘조용히 잊혀진 이름’이다. 이때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영원히, 조용히 사라진 것 같던 이름과 소원은 화자가 ‘알고 있음’으로 인해서 사라지지 않고, 잊히지 않는다. 사라질 뻔한 이름과 그 이름의 소원은 적어도 화자의 ‘앎’속에서는 살아있으며, ‘앎’으로 인한 기억 속에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알아"는 조금 더 힘있는 진성으로,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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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사라진 이름을 되살려내지 않는 한 아무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름에게 소원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지금은 추측만 할 뿐이지만, 어쩌면 김춘수 시에서처럼 '잊히지 않는 것'이 대부분 이름의 목표이자, 소원이었을지 모른다.



잊을 수 없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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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택이는 엄마가 언제 제일로 보고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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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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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하나씩은 있다. 그 이름에 대한 그리움은 문득 생각나는 옛 친구나 스승을 떠올릴 때의 감정과는 종류가 다르다. 의지가 들어가지 않아도 가능하게 되는 그런 일이다. 아마도 그런 그리움은 모진 아픔과 닮은, 마음에 새겨진 상처와 닮은 모양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잃어버린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감정이 아픔에 가까울 때 그 이름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마치 아픔이 존재를 기억하는 촉매처럼 작용하듯 말이다.



무슨 자신감으로


깨어질 듯이 차가워도
이번에는 결코 놓지 않을게
아득히 멀어진 그날의 두 손을


이 노래를 들으며 놀라고 벅찼던 이유는 화자가 발휘하는 용기 때문이었다. 이미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화자도 모르는 건 아닌데, 그리고 한 번 놓친 손을 다시 잡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텐데, 자기도 ‘그날의 두 손’은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히 멀어졌다’고 말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번에는 결코 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완전히 사라진 다음을 뜻하는 '이번'이 있기는 한가?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아니다, 더 들어보니 화자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으로 '가자'고 말하는 건 아니었다. 화자가 가자고 말하는 곳은 화자조차도 ‘믿을 수 없도록 먼’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믿을 수 없이 거리를 왜, 어떻게 '가자'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보이지 않도록, 믿을 수조차 없도록 먼 길에도 언젠가 ‘끝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적당한 위로를 베푸는 대신 "나도 그 길이 얼마나 먼지, 얼마나 가야하는지는 몰라. 그런데 언젠가는 끝날거야. 그러니까 가 보자!"고 말한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 믿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멀다. 그래서 두렵다. 하지만 이 멀고 먼 길은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가 보는 것이다. 새벽이 끝날 때까지.


 
완성될 수 없는 애도
 
아이유는 이 노래를 만들면서 "정말 힘든 작업이었고, 쓰면서 많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내게도 가장 큰 위로가 돼줬던 곡"이라 밝히기도 했다.

아이유의 말은 언뜻 들으면 낭만적이다. 그러나 무너지고, 위로받고, 성장하는 서사를 낭만적인 의미로 안전하게 봉합하는 일이 가능한가? 분명한 건 '무너짐'은 적당히 미화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건 '깨어질 듯이 차가운' 아픔이며 '끝없이 길고 짙고 어둔 밤 사이'를 걷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무너져야 다시 일어날 수 있는가? 무너짐이 곧 일어남에 대한 희망인가? 필자는 이 물음에 대해 일단의 답을 내릴 수 없다. 바닥까지 무너지고 다시 일어날 때 이전의 모습과는 같은 모습일 수 없었다는 경험은 소중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없어도 좋으니 무너지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모두가 행복하기만 하면 좋겠다.
 

삶을 애도로서 경험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겪었던 상실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은 우리에게 단순한 희망을 준다.
다음에 반복될 땐 달라질 수도 있으리라는 것.

- 책 <애니> (정한아 저, 문학과지성사 출판)
p.274 이소연 해설


하지만 그런 삶은 없다. 그래서 슬픔을 잘 관리하고 달래는 법이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책 <애니>를 통해 '애도'의 개념을 배웠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당시 정한아 작가의 <달의바다>를 읽었다. 마냥 밝기만 했던 그 시절의 온도와 닮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약 6년 후, 이 작가의 다른 책 <애니>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달의바다>와 같은 행복을 맛볼 줄 알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너무도 다른 느낌을 안겨주어 당황스러웠다. 오히려 책을 읽고 엄습하는 무기력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필자는 <애니>를 꼭 두 번 읽어야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두 번 읽으니 마음이 천천히 맑아지는 느낌을 받고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해설가 이소연은 책 <애니>는 "(<달의 바다>에서 볼 수 있었던)성장의 후광을 걷어내었다"고 평했다. 성장을 약속하지 않는 무너짐, 잔인한 상실의 반복, 그럼에도 기이하게 그런 곳에서 피어나는 다른 색의 꽃, 그것이 애도였다. 같은 맥락에서 노래를 반복해 듣는 행위는 내가 잃어버린 이름을 애도하는 행위였다. 이름을 잊을 수 없는 한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름에게' 화자가 "몇 번이라도 (네 이름을) 외칠게"라고 말 하는 것처럼 나는 노래를 들으며 마음 속으로 그리운 이름을 몇 번이고 외쳤다.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생각했을 당시 묘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년 후 비슷한 일을 당한 이의 소식을 들었을 때 정작 필자는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못했다. 내가 경험한 아픔과 그 사람의 아픔이 완전히 같은 모양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 그 이를 위로할 자격이 있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미안하고 안타까웠지만 나는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어 참 다행이다. 말이 할 수 없는 위로를 건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처럼 위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망설이는 자에게도 '가자'고 조금은 힘을 내어 말할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

'이름에게'로 필자는 사랑하는 이름을 떠올리고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동시에 이 노래로 세월호 사건을 반추하곤 한다. 여전히 '끼워 맞추기식의 해석'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겠지만,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게 되는 사건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의 한계를 인정하되, '이름에게'로 그 아픔에 참여할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지난 4월 16일,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remember0416를 달고 애도를 표하는 수많은 게시글이 올라왔다. 아마 유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애도는 이 날에만 그치진 않을 것이다. 아픈 이름을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은 괴롭고 힘들다. 그러나 이 기억 속에서 '매일' 보고싶은 얼굴, 기억하고 싶은 이름, 그 이름의 소원은 4월 17일에도, 18일에도, 그 다음날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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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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