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웅녀 신화의 변주, 처의 감각

글 입력 2018.04.1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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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웅녀 신화의 변주
처의 감각


연극 <처의 감각>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독특하고 몽환적으로 변해간다. 그 꿈같은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독특해져서, 이제는 이 연극이 정말 무대 위에서 진행되었는지도 아리쏭하게 느껴진다. 곰 아내가 객석에서 등장하고, 그녀의 새로운 인간 남편과 다른 등장인물이 객석에 앉아 극을 관람한다. 등장인물은 독특한 말투와 텐션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인간 남편의 전 여자친구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처럼 여기 저기 등장한다. 연극 중간 중간 끼어드는 우스꽝스러운 대사와 연출, 뜬금없는 일렉트로닉 음악은 비현실적인  연극은 현실에 있는 사람과 공간을 이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처의 감각>은 연극다운 연극이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행위를 했지만, 그것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처의 감각>의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숲에 버려진 한 남자가 동굴에 혼자 살고 있는 한 여자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한다. 그녀는 숲에서 길을 잃은 뒤 한때 곰과 살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러던 중에 사냥꾼을 만나고,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이가 죽어야 한다'라는 사냥꾼의 타의에 의해 아기가 살해당한다. 그녀는 곰 남편과도 이별하게 되었고, 그녀는 곰을 찾아 동굴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남자는 그녀가 곰남편을 찾는 것을 돕기 위해 동행한다. 그러던 중 여인숙의 주인이 건넨 산딸기주로 동침을 한다. 동침으로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 여자는 그를 따라 기찻길을 지나 도시로 떠나고, 그들을 가정은 꾸리는 평범한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에 점점 지쳐간다. 여자는 점점 인간들의 잔인한 본성에 환멸을 느끼며 점점 집안으로만 숨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싫증을 느끼고,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린다. 그러던 중 아내를 만나기 전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서 '순수박물관'에 대한 편지 내용을 받는다. 그녀가 말한 '순수박물관'에는 거짓말 하룻밤을 보낸 여인숙에 다시 돌아온 밤,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여자친구가 편지로 말한 '순수 박물관'으로 도피한다. 아내도 아이들을 버리고 곰남편을 찾아 떠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동굴/여인숙-기찻길-인간세상-기찻길-동굴/여인숙 이라는 극의 구조가 꽤 독특하다. 현실 세계에서 동떨어진 남자와 여자가, 모두 '동굴'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다.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동굴 속은 따뜻하다. 동굴은 둘 뿐만 아니라 곰에게도 따뜻한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동굴'은 인간과 곰이 모두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남자와 여자 모두가 동굴 밖인 인간세상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 다시 동굴을 찾아 헤맨다. 부부는 곰-인간 이라는 경계에서 방황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곰 아내와 인간 남편이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은 아니다. 동굴 안에서 그들은 하나일 수 있어도, 다른 길을 갔다. 남편은 곰의 감각을 회복하길 바라지 않는 인물이고, 곰 아내는 인간과 곰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다. 사냥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세계에 있는 남편은, 곰의 감각을 잊지 않는 아내를 볼 때마다, 손에 묻은 피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곰 아내를 해석의 중심으로 보면, <처의 감각>은 곰아내가 곰인 부분을 끝없이 살해당하면서도 곰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숲의 짐승을 살해하는 사냥꾼이 곰남편과 곰아내의 자식을 살해한 순간이, 곰아내가 지니고 있었던 짐승성을 살해당하는 첫 순간이었다. 그녀는 계속 인간과 가까워지지만, 정말 인간이 되지는 못한다. 그녀가 사냥꾼이 아니라 곰이 되길 바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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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삶이 폭력에 얼룩졌다고 해서, 그녀를 단순히 '피해자'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녀의 삶이 곰의 본능을 잊은 자들에 의해서 온통 산산조각 난 것은 맞지만, 그녀는 늘 다시 자신의 감각을 지키고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매일밤 온몸을 유린당하는 것과 같았다던 남편의 말을 통해, 남편과 낳은 두 아이를 모두 버리고 온 비정한 모성에서 그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아내에게서 공포를 느낀 남편의 말도 중요하지만, 아이를 버리는 아내의 모습은 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아이들은 인간 세계에서도 그녀가 지키려고 했던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끝내 무너져가는 집 속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필자는 그때 그녀가 '인간이 된 웅녀', 혹은 '단군의 아이를 낳아주던 웅녀'의 모습을 모두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인간성이 권력과 폭력의 또다른 말이었다는 것을 알아 버린 것이다. 집과 아이는 그녀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있고 찬란한 것이었다. 남편과 함께 했던 집은 그녀가 인간세계에서 재현해낸 동굴이었지만, 곰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기에 버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행동이 가장 인간같은 행동이었다. 인간다운 행위를 하고 나서야 인간을 포기할 수 있다는 점이 모순적이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비극이지만, 곰의 감각을 회복하길 바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렇듯 그녀는 자신이 가장 혐오하던 행위를 스스로 하면서까지 곰남편을 찾으러 간다.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무너지는 집을 뒤로 하고 곰 남편을 찾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끝없이 다시 일어나고,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단군의 아내가 되기 위해 끝없이 마늘을 입에 넣어야 했던 웅녀의 회귀는, 곰아내를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폭력과 권력을 비정하게 해체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곰아내'가 고통받는 이야기지만, 필자가 감상한  <처의 감각>은 '단군신화'가 아니라 '웅녀신화'를 변주하고, 기존 신화를 파괴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도 결국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세계에서 곰아내와 그녀의 동굴을 바랬던 것 같다. 그는 곰이될 용기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냥꾼이 되지도 못했다. 그는 모호함을 견디지 못해 끝까지 도망갔을 뿐이다. 그가 곰아내로 대표되는 본능을 정말 완전히 부정했다면,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고향에 돌아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종래에 선택한 것은 전 여자친구가 기다리는 '순수 박물관'이었다. 순수박물관에는 연인의 사랑의 증거를 모아둔 박물관이다. 여자가 썼던 칫솔, 여자를 바라본 창틀을 모두 모아 놓은  순수 박물관은 그 어떤 것보다 순수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사실 순수박물관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거짓말의 집합일 뿐이었다. 남편의 전 여자친구는 남편과 자신이 정말 순수한 사랑을 했었을지에 대해서 묻는다. 우아한 발레 동작을 하는 전 여자친구는 당장 날아갈듯한 백조같다. 곰과 다르게 불완전함에 기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는 좀 더 인간의 삶과 닮은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남편은 전 여자친구가 기다리는 '순수박물관'을 향해 도망갔다. 로맨틱한 거짓말로 가득한 삶이 그에게 편안했기 때문이다. 곰 아내가 자신의 선택으로 동굴을 향해 내달렸다면, 그는 거짓말을 향해 내달렸다. 고통스러운 실존의 늪에 빠지기보다, 영원을 약속하는 사회의 최면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필자로선, 솔직히 곰아내보다는 인간 남편의 선택이 이해가 갔다. 사실, 돌이킬 수 없을만큼 실수를 저지르고 그에 억눌려 사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온 사물에서 팔랑 팔랑 거리며 영원과 순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전 여자친구의 말보다 더 달콤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있겠는가.

아직까지 연극과 관련해 여러 질문과 가설이 머리를 둥둥 떠다닌다. 짤막하게나마 연극을 곱씹었지만, 생각이 명확해진 것은 아니다. <처의 감각>의 매력 중 하나는 이런 애매함인 것 같다. 모호함이 과하면 기분이 나쁜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 생각의 고리를 도저히 끊이질 않는다. 그 생각의 고리가 끝없이 연결되어서 더욱 <처의 감각>이 꿈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필자에게도 미세하게 존재하는 '곰의 감각'에 배우의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함께 박혔다. 필자가 생각했을 때, 연극에서 내걸었던 '약자의 감각'이란 결국, 마늘과 총 앞에서 유린당할 수 없었던 곰의 감각을 칭하는 것 같다. 연극에서 내비친 공간은 당연 동굴이었다. 그 동굴 안에서 약자는 없었다. 어두운 곳에서 사람인지 곰인지 알기도 어려운 곳이니, 그곳에 구별이 생길리 없다. 생각해보면  애당초 '약자'를 만드는 것도 인간의 총과 마늘이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약자가 존재할리 없다. 약자가 되길 두려워하지 말라는 연극의 슬로건은, '사냥꾼'이 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들린다. 아이러니하게도, 곰아내가 보여준 것 처럼 약자의 삶이 더 강한 생명력을 보인다. 필자는 종교가 없지만, 유독 곰아내에게서 예수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도 끝없이 고통을 준 핍박자들보다, 부활한 예수처럼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예수는 인간세계의 기준에선 약자였지만, 그 누구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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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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