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전쟁의 얼굴을 하고 있다.[도서]

글 입력 2018.04.1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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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으로, 질적으로 이 책을 완독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난 전쟁 시대에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전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가끔 영화의 소재로 사용된 전쟁에 관해 공부하겠다고 극장을 나오며 다짐하지만, 그 다짐은 집에 도착함과 동시에 자취를 감춘다. 영화는 영화인가 보다. 전쟁의 민낯을 극화, 미화시킨다. 전쟁영화 대부분의 목적은 관객들의 눈물이다. 행복하고 평화롭던 마을이 기,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한 뒤 떠나는 몇 인물이 승, 터지고 날아오고 던지고 쏘는 전쟁 속에서 몇은 죽고 몇은 살아남는 전, 집에 있는 가족에게 쓴 편지 혹은 죽기 전 마지막 유언이 결.

가장 최근에 본 덩케르크는 단연 달랐다. 이러한 기승전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물론 한국 전쟁영화에 해당한다. 모든 한국전쟁영화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껏 본 전쟁영화들은 그러했다. 그런데도 항상 눈이 팅팅 부어서 나오곤 했지만. 덩케르크 작전을 보여준 <덩케르크>에서는 육, 해, 공에서의 전쟁 상황을 묘사했다. 긴박하게 조여오는 상황이 있던 건 아니지만 색채감도 뛰어났고 지금껏 본 전쟁영화 중 가장 정적으로 작전을 보여준 영화였다. 이 글을 쓴 이유가 영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으니 다시 책 이야기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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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560페이지로 이루어졌고, 글씨체가 큰 편도 아니다. 따라서 학교와 대외활동으로 바쁜 틈에서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사실 양은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내용이 힘들었다. 이런 주제의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워낙 감정적인 나이지만 이 책을 읽을 때는 어딘가 차분해지면서 고요해졌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격정적으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러시아라고 하면 친숙한 나라는 아니다. 작년 여름에 다녀온 러시아 여행이 아니었다면 평생 러시아를 그저 추운 나라로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전쟁에 대한 민낯을 보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한.

구글에 전쟁을 검색하고 이미지 분야에 들어가면 남자들만 주야장천 나온다. 물론 여자들도 나온다. 포로로, 노예로, 그리고 되지도 않는 해바라기 꽃을 총구에 꽂는 사진으로. 아직도 전쟁과 여자의 관계는 허망하게 소비되고 있다. 물론 나 또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여자는 그저 집에서 하염없이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일,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여자들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혹은 전쟁에서 군인들의 식량을 책임지고, 빨래를 해주는 일까지만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책이 날 구원했다. 그리고 희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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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이 말은 책을 다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본질을 안다는 것과 무지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 모두 고된 일이다. 본질을 안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생각과 고통이 따르게 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지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냉철하게 말하면 2차대전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치부해도 나에게 자격을 지닌 채 돌을 던질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200여 명의 여성들을 만나면 상관이 없는 일인가? 라고 자문하게 된다. 모두 다 불쌍하다고 말한 대상에는 말을 내뱉고 있는 화자 또한 포함된다. 어쩌면 저 말을 하면서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했을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전쟁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을, 생각을 뱉을 수 있게 되었다는 처지가 불쌍하고, 그동안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했던 것이 불쌍한 것이다. 그중 제일 불쌍한 점은 다시 전쟁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참전할 자신이 제일 불쌍하지 않을까?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결국 사람은 혼자야.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홀로 죽음을 대면해야 하거든. 나는 그 끔찍한 외로움을 알지.”
-전쟁터만큼 사람이 많은 곳이 또 있을까? 그렇게 무서운 목적성을 지닌 채 만나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대신 무언가를 해주는 서비스가 늘고 있다. 배달대행업체는 물론이고, 돈이면 뭐든 대신해주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갑부라도 자신의 고통, 아픔,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눈앞에서 죽음이 날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알고 기다릴 때의 외로움을 누가 알아주고 누가 위로해줄까. 특히나 죽임의 앓는 소리가 잦은 전쟁터에서는 한명 한명의 죽음을 며칠이고 눈물 콧물 빼며 애도할 시간이 없다. 엎치락뒤치락 다시 땅을 뺏고 빼앗기는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외롭게 홀로 자기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이들을 바라본 많은 여성이 있다. 이것은 비단 여성들만의 상황이 아닌 전쟁에 참전한 모든 이들의 상황에 해당할 것이다.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은 눈앞에서 오가는 죽음들을 받아들이고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 잃은 죽음이 언제 내 앞에 서서 날 집어삼킬지 가늠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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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용감했다. 남자들과 똑같이. 전쟁이 나자 여자들은 달려갔다. 최전방에 자신을 배치해달라는 용기와 함께. 하지만 매번 퇴짜를 맞았다. 여자라서, 어려서 안 된다는 말로 그녀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들에게 부족한 점들을 배우고 습득하며 군인에 걸맞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그들의 모습을 쳐다본다. 하이힐을 벗고, 여자 치수가 없는 크고 투박한 군화를 발에 신는다. 머리는 모두 밀어버리고, 여자 속옷마저 공급되지 않았다. 이렇게 처참한 환경에서도 그녀들은 여타 다른 남성군인들과 똑같이 싸우고 나아갔다. 한 달에 한 번 야속하게 바짓가랑이를 붉게 적시는 기간에도 그녀들의 발걸음은 끊임없이 적군을 향해있었다. 그녀들은 강했고, 담대했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차별의 현장에서 싸웠다.

결혼할 남자의 집에 가져간 선물들이 내동댕이쳐졌다. 여자가 군인으로서 참전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결혼을 못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다른 여자들의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했고 함께 전쟁에서 싸우고 전우애를 다졌던 남자들도 외면하기 시작했다. 나라도 그녀들을 외면했다. 전쟁에서는 몸의 병이 그녀들을 괴롭혔다면, 현실에서는 마음의 병이 그녀들을 괴롭게 했다. 함부로 전쟁의 이면을 발설하지 못했고,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녀들에게는.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그녀들의 인생은 아픔으로 시작되었다.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심리적으로 그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치료해줄 방안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아픔은 곪고 상처가 되어 흉터로 남았다. 늦었지만, 그녀들의 아픔을 상처를 보듬어줄 방법은 그저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방법뿐이다. 아무도 그 거대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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