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희생을 통한 다시 태어나기, 연극 '처의 감각'

글 입력 2018.04.18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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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예술센터 2018 시즌 프로그램
프로젝트 내친김에 공동제작

연극 처의 감각


작 고연옥 / 연출 김정


인류는 태초에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로부터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농업 혁명을 거쳐 농사일과 노동이 주가 된 부계 사회로 바뀌기 전까지 말이다. 여성이 생명을 낳으며 후대를 이어나가는 어머니로서의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니, 모계문화는 보편적인 인식에 기반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신화에서 또한 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단군신화에는 그 시초에 웅녀가 있었다. 중국의 기원 신화에서는 황토를 빚어 인류를 창조한 신을 여신인 여와(女娲)로 기록한다. 이처럼 원시사회에서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모계 신화가 자주 등장하였다.

'처의 감각' 속 여자는 바로 이러한 태곳적인 여성의 원형을 지니고 있었다.

극은 앞서 말한 웅녀 신화를 모티브로 하여, 처(妻)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던 여성을 그려낸다. '처'는 한 때 동굴에서 곰과 살며 아기를 낳았던 인간. 무용가 윤가연의 거칠고 역동적인 몸짓과 함께 태어난 그녀는 마치 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처럼 원시적이며, 태곳적인 신비를 품고 있었다. 이러한 원초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신화 속 웅녀를 떠올리게 했다. 곰과 함께 살았다는 그녀가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다가도, 곰이 그녀 곁을 떠나고 사냥꾼의 폭력에 아기를 희생당한 처지에 놓이자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게 했다.

이후 인간인 남자를 만나고 일순간에 그의 아기를 갖게 된 그녀는 떠밀리듯 동굴 안을 나오게 된다. 마치 아기의 죽음이 기존 세계와의 싹을 잘라낸 의식이었던 마냥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사회에서 평범한 가정을 꾸려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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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으로 보인 그녀가 세상의 삶으로 들어와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한 여자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여자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부여하고, 남자에게 가장으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부여하는 결혼이라는 매개체가 있었다. 우리와 다른 세계일 것만 같던 곰의 아내에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린 그녀의 삶은 우리가 늘상 보아왔던 장면의 연속이다. 하루 종일 내 몸인 마냥 아기를 어르다가 저녁이 되면 피곤에 지친 남편을 마주해야 하는 여자. 남자 또한 직장생활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싶다가도, 아내와 자식을 홀로 부양해야 한다는 데 환멸을 느낀다. 결혼으로 인한 제약과 피로감, 남녀의 역할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구조는 불가피한 인간의 불행이다.

삶의 방식이 달라졌으니 저항할 법도 한데, 그녀는 놀랍도록 순순히 결혼생활에 적응한다. 결혼을 후회한다며 자신을 매번 다그치고 원망하는 남자에게 반박 한번 하지 않고, 간병하던 노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며 고된 육아일을 홀로 감당해내야 하는데도 그녀는 늘 수동적으로 감내했다. 가부장제와 그에 따른 여성상이 깊게 스며든 사회에서 손과 발이 묶인 탓일까. 그녀의 모습에서 약자로 낙인찍힌,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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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결국 자유를 찾아 가정을 떠난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을 찾아, 또 '순수박물관'에 박제된 전 연인과의 추억을 찾아 훌쩍 떠나버렸다. 늘 그가 도망치려는 것을 붙잡은 처자식을 남겨둔 채로. 도피하듯 떠난 그에게 미련과 죄책감이 없을 수 있을까? 인간의 욕망에는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남듯, 그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찾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여자 또한 '처'의 굴레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남자와 달리, 그녀는 스스로의 뜻으로 자식을 죽이게 된다. 또 자식을 희생당했던 이전과는 달리, 스스로를 정화시키려 이전 세계의 싹을 잘라낸 그녀는 아내였던 자신을 제3의 시선으로 응시한다.


"..... 당신은 내 아내였지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다가 남김없이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던,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 .... 이제 나도 당신의 자리에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에게서 전해져 온 감각으로.... 당신에게 가는 길을 찾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한 때 누군가의 아내로서 감내했던 '처의 감각'으로, 그녀는 자신이 가장 나약했던 약자로서의 삶을 경험했다. 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위해 살아야 했던 삶이다. 그러나 스스로 이를 깨뜨리고 다시 태어나려는 의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특히 타의로 희생을 당했지만, 다시 자의로 희생을 감내하는 일련의 과정은 경험을 통해 깨어난 자의식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다. 우리가 으레 겪는 불행은 내가 피부로 느낄 때야 와 닿는다. 한편 우리가 얻는 지혜와 기지 또한 경험의 산물이다. 경험이라는 희생 제의를 통해 우리는 전보다 나은 나에게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 대한 인습과 낡은 관념을 정화시키는 과도기에 있다. 그것이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하든, 자생적인 노력과 회복을 통해 또 다른 아픔과 불행을 번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심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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