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고등래퍼2 >, 이병재(빈첸), 전혀 행복하지 않아도 돼 [음악]

글 입력 2018.04.2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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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래퍼2>. 참 열심히 봤다. 랩이 무엇인지, 힙합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른다. 하지만 어릴 적 어떤 래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다른 장르보다 자기 이야기를 참 솔직하게 털어놓고 누구보다 가볍게 내 자신을 쏟아낼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은연 중에 곡을 많이 듣곤 하지만 마음에 와닿는 곡이 막상 아주 많지는 않았다. 수많은 '나'를 쏟아낸 결과물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까지 전해지는 울림은 아니다. 독백이지만 대화여야 한다는 게 이 장르의 숙제가 아닌 듯 싶다. 혹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삶의 숙제겠지.

 이병재(빈첸)는 첫 등장부터 방송에서조차 편견이 가득했다. 프로그램의 반이 지날 때까지 눈동자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이 길 잃은 삽살개처럼 덥수룩한 머리가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다들 그에게 말을 쉽게 걸지 않았다. 그걸 병재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어쩌면 <고등래퍼2>가 그에게 '김하온'으로 남은 건, 그런 그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루만져준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에겐 찾아볼 수 없었던 생각과 랩이 가득차 흥미롭기까지 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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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그는 싸이퍼 때 '랩알못'이라 해도 참 실력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 와닿지는 않았다. '마른 풀에 기름을 부어 난 방화범이 될 테고 소방관은 네 엄마로 하자고 우리'라고 웃음기를 지으며 딸꾹질스러운 랩을 하고 돌아섰을 뿐이다. 오히려 그 다음 무대인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라는 곡 때문에 한참을 보고 있었다. 같은 합정이지만 누구는 메세나폴리스에 살고 누구는 몇 평 안되는 지하방에 산다. 누군 고생하나 안하고 하고 싶은 걸 다할 수 있는데, 누군 하고 싶지 않은 일하면서도 쥐꼬리같은 돈을 벌어 쓰는데 전전긍긍한다. 그런 모습에 '그대들의 돈은 노력인가요 집안인가요'라며 묻는 건 많은 걸 함축하고 있었다. 행복한데도 혼자 자주 운다며, 이제 더 이상 내 팔을 보고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고맙다며 덤덤하게 말하는 그 가사에서 멈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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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말은 아니다. '제 노래를 듣고 있는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땠고 지금은 또 어떤 기분이신가요'라는 그냥 질문일 뿐이다.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질문. 외국어를 배울 때마다 기분이 어때, 오늘 하루는 어때 묻는 표현을 배운다. 한국에서 살면서 기분이 어떤지, 하루가 어땠는지 물어본 적도 답해본 적도 많이 없다. 그냥 우리는 돌려 말한다. '술 한잔 하자, 밥은 먹었냐, 잘 지내냐'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외국어에서 우리의 기분과 하루에 대한 질문을 배우면 우리는 정말 맹목적으로 오, 난 좋아, 잘 지내, 괜찮아라는 대답을 한다. 기분이 안좋다고 하면 구구절절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상대방이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이런 이야기까지 해서 상대방을 우울하게 해도 되는지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 그렇게 다 괜찮다고 하고 혼자 남아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슬픔과 아픔, 외로움과 덩그러니 남는다. 그마저도 피하려고 도망다니지 않는가. 계속 혼자이면서도 날 바쁘고, 정신없고, 취하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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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재는 악에 받친 듯 보이지만 그의 랩을 들으면 모두들 그를 안아주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련하고, 애틋하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콕콕 박혀온다. <타는 목마름으로>에서는 '매일 자기 혐오에 빠져 쳐울다 이제야 나를 사랑하는 법을 조금 배웠어'라며 빚 다 갚고 빛을 볼 거라고 했다. 그를 안아주고 싶었던 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나와 당신, 우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인다. 내가 나를 그리 사랑한 적 있었던가. 부족함만 보느라 스스로에게 참 박했다. 그러면서 남들에겐 사랑과 칭찬을 갈구한다. 자기 혐오도 모순적이게 사랑이긴 했을 것이다. 아쉬웠던 거지. 내가 꿈꾸는 나에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좀만 더 기다리면 사랑해주겠다며 몰아붙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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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랑받을 가치 있는 놈일까
흰색 배경에 검은 줄이 내 팔을 내려 보게 해
이대로 사는게 의미는 있을지 또 궁금해

니까짓게 뭘 알아 행복은 됐어
내 track update되는 건 불행이 다 했어
잠깐 반짝하고 말 거야
Like 바코드 빛 같이 우리도 마찬가지

비틀비틀거리는 걸음이 나 다운것 같아
깊은 늪에 빠져있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 난

meditation 내 tension에 도움 안돼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바코드를 횡단보도 삼아
뛰어서 벗어나야겠어 이 네모 밖으로 말야

영수증을 챙겨줘 우리 추억을 위해

-<바코드> 중


 프로그램의 뒤로 갈수록 참 좋은 곡들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무척 좋아하는 곡 <바코드>. 크게 의미없는 것 같은 줄무리를 보고 자신의 팔목의 상처와 곁에 있는 하온이 함께 떠오른 모양이다. 이전 곡에 비해 훨씬 마음에 드는 가사들. 정말 많아서 거의 거를 수가 없었다.  곡이 끝나갈 때까지 영수증을 버리겠다던 병재는 마지막엔 영수증을 챙기겠다고 했다. 그간 버렸던 영수증, 혹은 어디 쳐박아 두었던 그 영수증을 가만히 모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병재야, 사는데 대단한 의미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사랑받는 데 무슨 가치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니야. 의미와 가치는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고.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바코드에 모든 게 담겨 있는 상품이 아니니까 바코드가 있지만 다르다고, 그 수많은 상처가 모인 바코드는 너만 갖고 있는 멋진 문신같은 거라고. 네모 귀퉁이를 돌아오면 알게 될 수 있을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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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파이널에서 보여준 <탓>. 병재가 궁금해져서 유투브에 다른 곡마저 한번씩 들어봤다. 믹스테이프 병풍은 절규였다. 살아있으면서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이 낼 수 있는 단단한 절규. 세미파이널에서 보여준 <탓>은 믹스테이프  '병풍'에 있는 <늪>과 <탓>이 함께 들어있다. 바코드 때의 공약이 지켜져서 드디어 거의 끝에 다와서야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생긴 친구였구나 하면서 새삼 눈빛이 강렬하다 싶다. 늪에 빠진 사람을 본 적도 있었고, 내가 늪에 잠겨있을 때도 있어서 공감이 간다. 사람이 힘들어서 등 돌려본 적 있었고, 나의 추잡함을 감추기 위해 혼자 숨어있기도 했다. 감정이 밀려온 탓인지 눈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악을 쓰면서도 흐트러짐없는 공연을 보고서, 기대치가 높은 병재의 간절함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칼날을 벼리듯 나를 몰아붙여본 적이 별로 없었다. <위플래쉬>의 플레처 교수가 내 안에서 나를 몰아붙인다면 저 정도일까. 간절한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진다. 나에겐 그 정도의 간절함이 없었다. 재미가 있거나,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면 앞뒤 안가리고 몰려들었을 뿐 모든 걸 걸고 해본 적이 없다. 그게 나의 애매함의 원인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의 넓은 스펙트럼의 '오지랖'을 지적해준 가사 역시 마음에 들었다.


넌 내 옆에 있어주기를 바랐던 마음
아직 선명히 남아 있어 등 돌리던 날

아주 더럽고도 추잡한 이 늪에 있어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떨어져 멀리
보이지도 않니 손에 미세한 떨림

난 기대치를 두 배로 올려
그래야 상실감이 거대해지니까
그래야 사람이 더 초라해지니까
그래야 내가 정말 간절해지니까
아니 얼마나 더 간절해야 합니까
기도 헌금을 누굴 위한 겁니까

한국 애들 종특
평가, 유행, 아니면
지 주관 밖의 일이라면 씹고 보는 탓
그런 놈이 되기 싫어 괜히 맞는 말을 했다가
이상한 놈으로 낙인이 찍힌 탓

-<탓>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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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고등래퍼2>의 마지막. 마지막이 아쉬운 게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만큼 내가 많이 좋아했다는 뜻이겠지. 파이널 곡은 <전혀>. 마지막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궁금했는데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비관주의자에겐 긍정과 행복을 강요하는 것 역시 독이 될 수 있다. 비관주의자가 나쁘기만 하다고 할 수 있는가. 역설적이게도 아주 비관주의자인 사람은 나쁜 일을 겪어도 더 최악인 상황까지 생각했던 터라 상황을 생각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두워보이고, 우울하고, 불행한 사람일수록 누구보다도 행복에 대한 고민이 가득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온과 병재가 그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온은 '행복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고 받아들였다. 행복이란 건 그렇게 움켜잡을 수 있는게 아니라 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병재는 좀 더 이상적인, 변하지 않는 행복을 찾고 싶어한다. 음악에서도 그렇고 전반적인 기대치가 무척 높다.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이 높기 때문에 쉽게 만족하기 어려울 뿐이다.

 사람들이 이제 유명해졌고, 돈도 벌고, 랩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니까 행복하지? 라고 묻는 모양이다. 좋은 의도의 우문이었고 병재의 답은 현답이었다. 잠깐 반짝이는 것들로 순간의 행복을 느낄 수 있지만 어디 그게 그렇게 오래 가든가. 유명세도, 돈도, 물밀듯이 들어왔듯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병재가 생각하는 '하루 온 종일 행복한 기분', 떠올려 보면 나도 그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다. 하루 정도 행복했더라도 아주 금방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이상하게 잠깐 행복했던 기억보다도 슬프고 부끄럽고 아픈 기억만 더 오래 남아있다.


좀 나아졌느냐 묻는다면 내 대답은 전혀
해 뜨고 한참 울고 다시 눈떠보면 저녁
난 행복해야 마땅할 놈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게 또 문제

달라진 건 날 보는 네 시선이지 전혀
그 때보다 행복한 것 같지도 않아 난 전혀

- <전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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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재에게 행복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이 폭력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그렇다고 정반대로 너무나 불행하다는 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태까지 불행과 늪, 탓, 자기 혐오, 고통에 휩싸였던 시간을 컨셉이라 규정지을 필요도 없다. 잠깐의 행복의 힘이 그 모든 걸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가 어떤 행복을 찾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 행복은 그냥 행복하라는 말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병재는 병재의 방식으로 그의 행복을 찾고 싶은 것 뿐이다.  그는 아직 목마르고 오른팔엔 바코드같은 상처가 있으며,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그의 목마름을 함께 지켜보고 그의 팔목을 보고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에게 어떤 기분인지 계속 물어주면 될 일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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