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한 입] 기운나도록, 영화 ‘남극의 쉐프’

맛있는걸 먹으면 힘이 나니까요.
글 입력 2018.04.20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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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필름 한 입
<남극의 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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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를 많이 포함합니다.


  한국의 어느 여름, 무더웠던 그 날. 나와 내 친구는 힘든 노동을 하며 다른 것도 아닌 맛있는 음식에 대해 말했다. 떡볶이, 아이스크림, 라면. 값비싸지도 않은 음식들을 줄이어 말하며, 음식들이 건네줄 위로를 찾았다. 이 지친 몸을, 이 노동이 끝나자마자 음식으로 달래주리라. 그렇게 주문을 외며. 음식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일할 힘이 났다. 마치 민요가 노동요로 쓰였던 것처럼, 음식 이야기는 우리의 노동요였다.

  막연하게 힘이 들 때, 이따금 누군가 함께 있어도 외로울 때. 우리에겐 맛있는 것이 필요하다. 영양소를 위해? 그런 거창하거나 섬세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힘들 때 맛있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운이 나니까. 맛있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여기, 그런 이유로 맛있는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여기는 남극. 해발 3,810m. 평균기온 -50도. 극한지 남극 돔 후지 기지. 펭귄도 바다표범도 살 수 없는 추위를 자랑하는 이곳에서, 무려 1년 반 동안 8명의 대원들이 고립되어 살아간다. 각자의 일은 다양하다. 기상학자, 빙하학자, 대기학자. 그리고 이들을 보조하는 차량 담당과 의료 담당, 조리 담당. 이 영화는 얼떨결에 남극의 쉐프가 된 니시무라와 동료 대원들의 이야기다. 실제 남극관측 기지에서 조리 담당 대원이었던 니시무라 준의 에세이 『재미있는 남극요리인』이 원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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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미디를 내세우고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제법 무겁다. 마냥 웃긴 장면들이 있지만, 그들은 결국 남극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꿈과 목적이 있다고 한들 사회와 격리되어있는 환경은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다. 더구나 남극은 너무나 어둡고 춥고 외롭다. 6월에는 햇빛조차 들지 않아 한 달 내내 밤이다. 영화의 제일 첫 씬에서 한 대원이 남극을 떠나겠다며 뛰쳐나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 있다. 바이러스가 살 수 없는 환경이라 감기도 걸리기 어려운 그들이, 마음 아픈 매일을 보내는 곳. 남극 돔 후지 기지다.

  남극의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대원들에게 힘을 주는 것은 1분에 780엔을 내가며 듣는 가족들 혹은 애인의 목소리. 그리고 조리 담당 대원 니시무라의 음식이다. 어느 날, 닭새우가 잡혔다는 소식에 대원들은 새우튀김을 외친다. 그러나 닭새우는 어마무시하게 커다랗다. 튀김으로 먹기는 영 알맞지 않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원들은 니시무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동요로 ‘에비후라이(새우튀김)’을 부르기 시작한다. 맛있는 새우튀김을 기대하며 대원들은 불평을 멈추고 눈을 퍼 나른다. 기운 좋은 목소리들이 남극에 퍼진다. 정작 닭새우 튀김을 마주한 대원들은 과거의 자신들을 후회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니. 음식은 정말 놀라운 존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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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주임은 밤마다 라면을 몰래 끓여먹는다. 니시무라에게 걸려도, 라면이 설익는다는 칭얼거림만 늘어놓을 뿐 고립된 남극에서 라면이 떨어진다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라면이 떨어지자 주임은 시름시름 앓는다. 늦은 밤, 주임은 자고 있는 니시무라를 찾아가서 힘 빠진 목소리로 라면을 찾는다. “내 살과 뼈는 라면으로 되어있다”면서. 일할 힘도 잃은 그에게 니시무라는 간수가 없기 때문에 하는 수 없다고 하지만, 아무 것도 못해준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낀다. 라면을 잃은 안타까움은 주임만이 가진 것이 아니다. 라면에 대한 갈망으로 간수에 대해 찾아보던 한 대원은, 이론 상 간수를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단 것을 알아낸다. 니시무라는 과감히 이를 시도하고, 마침내 남극에서 니시무라 표 라면이 탄생한다.

"엄청난 오로라에요! 관측 안하세요?"
"오로라? 상관 없어. 면 불어."

  오로라고 뭐고 상관없이, 대원들은 정신없이 라면을 먹어치운다. 마치 물고기가 물 만난 듯. 그간 있었던 속상함과 울적함을 잊고. 오로라를 알리러 온 대원도 ‘내 인생 최고의 오로라’라고 말하면서도 스리슬쩍 자리에 앉는다. ‘맛있는’ 라면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면이 불어버리는 것이 오로라 광경을 놓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니까. 주임은 맛있게 라면을 먹어치운다. 누군가의 울적함을 위로하기 위해 이토록 진한 위로를 건넨다는 것. 이 영화는 주임의 행복한 표정을 통해 그 진한 위로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남극의 쉐프는, 마음을 치료하는 최고의 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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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조리 대원 니시무라의 마음은 누가 치료해줄까? 어느 날, 대원들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니시무라가 깊은 상심에 빠진다.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침대에만 박힌 니시무라를 대신해, 대원들은 양 손을 걷어붙이고 부엌에 모인다. 누군가는 기름 튀는 것을 두려워하며 가라아게를 튀기고, 누군가는 무순을 자르며 ‘과연 이것을 써도 되는 것이 맞냐’ 걱정하고 있다.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혹은 사과를 건네기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니시무라는 황당함과 감동을 감출 수 없다. 초라하게 차려진 밥상에도 니시무라는 눈물을 보이고 만다. 음식의 맛과 상관없이, 누군가가 해주는 밥을 먹는다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끔은, 누군가가 해준 밥상 그 자체가 치료제가 되기도 한다. 음식이란 이렇다. 이렇게 대단하다. 이렇게 따뜻하다. 심지어 남극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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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유카가 엄마에게
밥을 해주는 건 어떨까요?
맛있는걸 먹으면 힘이 나니까요.

-남극의 쉐프, 니시무라 준


  황량한 남극, 추운 눈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그 곳에서 음식은 살뜰히도 대원들을 보듬어주고 있었다. 힘들고 외로워도 모두가 같은 처지임에, 그리고 오늘도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받을 수 있음에 웃음 짓는 8명의 대원들. 전화조차 받지 않으려는 부인과, 헤어지자는 통보를 하는 애인에도 술과 마작, 그리고 매 끼니로 그들은 지지 않고 매일 살아남는다. 기운 차려가며. 언젠가 귀국하는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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