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낫심, 어느 한 이란 작가의 이야기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4.29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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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4월 18일, 한예리, 문소리, 유준상, 류덕환, 진선규 등 유명 연기자들이 즉흥연기를 선보인다는 ‘낫심(Nassim)’ 연극을 보러 갔다. 4월 10일부터 4월 29일까지 총 3주간 진행된 이 연극은 매회 새로운 배우들이 등장한다. 딱 한 사람만이 유일하게 내내 등장하는데 바로 이 연극의 창작자이자 극작가인 이란 작가 낫심이다. 여러 배우와 특별한 공연을 만드는 ‘낫심’의 설정은 이렇다. 배우는 극본 없이 무대에 초청된다. 낫심은 총 400페이지가 넘는 극본을 준비해서 배우에게 대본을 읽게 하고 극본에 적힌 무대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4월 18일 공연에는 영화 ‘범죄도시’의 깡패역할로 유명해진 진선규 배우님이 초대되었다. 진선규 배우와 낫심이 만드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일 공연은 실로 기억에 오래 남았다. 배우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감동적이었던 이 연극,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1. ‘살람’ 낫심
(*살람 = 이란어로 '안녕'이라는 뜻이다)


 두산아트센터 PD와 함께 등장한 배우. PD는 아무 정보 없이 공연장에 도착한 배우에게 연극 ‘낫심’과 관련된 지시 사항을 알려준다. 배우는 지시 사항을 듣고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며 결심에 선 듯한 얼굴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극이 시작되자 배우도, 관객도 모두 처음 접하는 낫심의 극본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낫심은 극 초반에 무대로 등장하지 않지만 스크린을 통해 그가 실시간으로 배우와 관객과 소통한다. 그는 천천히 대본을 한 장씩 넘기면서 배우와 ‘짜여진’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마 모든 배우가 똑같은 극본을 읽었을 테지만 배우와 관객의 반응에 따라 낫심의 반응도 재밌게 변했다. 예를 들자면 낫심의 극본에 ‘기울어진 이탤릭 글씨체는 행동 지시이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읽지 마라’는 문구가 써져 있었는데 진선규 배우는 혼자서 이끄는 공연이 살짝 당황스러웠는지 (혹은 이탤릭 글씨체가 잘 보이지 않았는지) 자꾸 지시부분을 읽어서 낫심이 손으로 살짝 짜증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관객에게는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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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살짝 스크린을 통해 낫심의 매력을 보니 낫심이 얼른 공연장에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스크린에서 알 수 있는 낫심의 단서는 팔과 손에 털이 많다는 것과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현재 작가가 이란이 아닌 독일에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더 얘기하고 싶다는 것이 무대 밖으로 전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진선규 배우는 곧 극본에 쓰인 대로 무대 뒤에서 낫심을 찾는 미션을 실행하게 되고 차를 마시는 등 여러 일이 일어난 다음에 낫심과 함께 무대로 등장했다. 낫심과 첫 만남의 느낌은 ‘이국적’이었다. 그러나 그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용기 있게 한국으로 온 낫심이 참 반가웠다.



2.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관객과 배우 그리고 낫심이 하나가 되다

 공연장에 등장한 이후 낫심은 우리에게 한국어를 배운다. 물론 나오기 전에도 우리에게 한국어 단어 하나를 알려달라, 한국어 욕을 가르쳐달라 라고 요구했었지만 나온 후에도 계속해서 한국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한국의 ______가 ______ 이다’ 라는 문구가 스크린에 등장했는데 앞의 빈칸을 배우에게 채워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관객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배우가 ‘정세’라고 적었고 그 뒤에 낫심이 조금 전에 배웠던 한국 욕 ‘*발’을 이어서 뒤칸에 적어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드려면 상대방의 문화와 언어를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와 관객도 낫심으로부터 이란어를 배운다. 처음에는 ‘작은 곰’, ‘옛날 옛적에’, ‘작가’, ‘집’ 등 외우기 어려운 단어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단어들을 제대로 외웠는지 배우를 시험하기도 한다. 낫심은 어렸을 적 엄마랑 ‘토마토데이’라는 게임을 했었는데 이 게임은 단어를 제대로 외우지 않았을 때 벌칙으로 토마토를 먹는 것이었다. 배우는 이란어 단어 퀴즈를 맞춰야 하고 틀렸을 경우 방울토마토를 먹어야 했다. 진선규 배우는 꽤 열심히 외워서 거의 다 맞추긴 했지만 틀렸을 때도 오히려 방울토마토를 먹고 싶었다며 즐겁게 게임에 임했다. 이렇듯 다함께 모르는 단어들을 배우면서 배꼽잡고 웃기도 하고 무릎을 탁 치기도 했다.

 그러나 낯설기만 한 단어들만 배운 것은 아니었다. 실컷 웃고 나서 배운 단어들은 머리가 아닌 바로 마음으로 와 닿는 단어들이었다.


‘머먼’

‘델람 바럿 탕 쇼데’


 연극을 봤다면 이 두 단어가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머먼’은 바로 ‘엄마’라는 뜻이고 ‘델람 바럿 탕 쇼데’는 ‘보고 싶다’라는 뜻이다. ‘델람 바럿 탕 쇼데’을 직역하자면 ‘마음이 구깃구깃해’라고 한다. 마치 편지가 눈물에 젖어 구깃구깃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머먼’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을 때 가슴이 찡하는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작품 ‘낫심’은 20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심지어 영국 에든버러 연극제에서 큰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정작 그의 모국어인 이란어로 공연된 적이 없다. 이란어밖에 구사할 줄 모르는 엄마를 위해 이란어로 번역하려 했으나 낫심은 자기가 가장 편하게 쓰는 언어임에도 번역하기가 어려웠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연극 ‘낫심’은 그의 엄마를 위한 연극임이 틀림없다.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얼마나 그가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릴 적 기억을 꺼내는가 하면, 자신의 집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참 신기했다. ‘머먼’이라는 단어 하나 얘기했을 뿐인데 사람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낫심의 극본에도 쓰였듯이 언어는, 신기한 매체이다. 말 한 마디로 이별할 수 있고,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뭉칠 수 있고 흩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마음에 닿는 단어이다. 심지어 같은 도시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해도 ‘낯섦’을 느끼는 지금 이 시대에 ‘엄마’ 즉 ‘머먼’이라는 단어는 모두가 따뜻하고 그리운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만들며 나와 다른 ‘이방인’과도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낫심의 인터뷰에 따르면 ‘엄마라는 단어는 각 언어마다 표기법이 다르지만 전 세계인 모두가 닿을 수 있는 주제이며 모든 사람이 공감하며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다’고 했다. 외국에서의 낫심은 ‘이방인’이지만 공연할 때만큼의 낫심은, 그리고 ‘머먼’이라는 주제를 나눈 그 순간의 낫심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마음이 통한 우리는 낫심의 집에 잠시 초대되었으며 그와 친구가 되었고 그의 아픔과 그리움과 사랑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 시작되었던 연극이 이토록 감동적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낫심의 진심이 배우와 관겍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뒤늦게 생각해 보았다.



3. 성공적이었던 낫심의 즉흥극

 즉흥극은 말 그대로 배우가 즉흥으로 연기하는 것이라 순발력과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을 보기 앞서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공연을 다 본 후에 알았다. 왜 낫심이 유명 배우들을, 그것도 베테랑 배우들을 섭외했는지 말이다. 낫심이 등장하기 전에는 배우 한 명이 극을 이끌어 가야하는데 대본도 잘 모른 채 관객과 함께 공연장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어야 한다면 매우 당황스러워했을 것이다. 진선규 배우는 처음에는 조금 어설픈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점점 연극에 물들어가면서 낫심이 적은 대사를 때로는 장난스럽게, 때로는 진심이 묻어나는 어투로 (예를 들면 ‘나 정말 잘 하고 있어요?’ 등) 관객 그리고 낫심과 소통했다.

 즉흥극은 배우의 능력뿐만 아니라 관객의 참여도 매우 필요하다. 이는 배우 혼자 극을 이끄는 것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때론 관객의 반응과 호응 그리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극을 더 다채롭게 만들기도 한다. 낫심의 대본에 따라 진선규 배우는 관객에게 “낫심에게 어떤 단어를 가르쳐줄까요?”를 물어보았고 관객은 여러 단어를 제시해서 하나를 알려주었다. 낫심 또한 대본을 통해 배우에게 질문을 했다. 낫심은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라고 물었고 이어서 ‘좋아하는 음식은 어디에서 먹을 수 있어?’ 또 ‘그곳으로 가는 지도를 그려줘!’라고 물어봤다. 그리고 관객에게 ‘같이 갈 사람?’이라고 물어보았는데 진선규 배우가 좋아하는 음식은 장모님이 해주시는 음식으로 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데 이 질문을 받고는 배우와 관객을 모두 빵빵 웃음보가 터졌다. 토마토데이 게임을 할 때도 관객 3명을 초대해서 함께 진행하기도 했고 진선규 배우가 토마토데이 수료증을 받을 때는 관객 모두에게 무대지시를 내려서 다같이 일어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즉흥극은 대체로 준비된 것이 없지만 배우와 관객이라는 변수에 따라 같은 주제라도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으며 매번 새로운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바라볼 때 4월 18일자 공연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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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규 배우와 낫심
(출처: 두산아트센터 인스타그램)





 ‘낫심’은 이란어로 ‘산들바람’이라는 뜻이다. 낫심의 엄마는 그의 이름을 지으면서 그가 멀리 세상으로 떠날 것을 이미 짐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바람에 날려 세계로 보낼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생각한 대로 낫심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수없이 이 공연을 올리고 있다. 많은 곳에서 공연을 했기 때문에 감정이 무뎌졌을 뻔한 데도 낫심은 매번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다고 했다. 그만큼 ‘머먼’은 그의 인생에, 그의 연극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연극을 본 지는 꽤 되었지만 지금 리뷰를 남기는 것은 그의 연극이 한국에서 진행될 동안 스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연극은 오늘 끝났으나 그가 우리에게 전달해준 메시지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이란어도. 산들바람처럼 널리 이야기를 전달해주기를 바라면서 인사한다. ‘살람 낫심!’ 한국에 와줘서 고마워요.


[김민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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