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강렬한 빨강을 직시하는 힘

연극 '빨간시'리뷰
글 입력 2018.05.02 22:3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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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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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조용한 곡소리 가운데 상여 행렬이 지나가는 걸로 시작된다. 행렬이 다 지나가고 잠깐의 암전 후, 무대에는 세 사람이 서 있다. 치매에 걸려 자꾸 헛소리만 내뱉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에게 벌컥 화를 내는 손자 '동주', 그 뒤에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젊은 여자. 살아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인데도 앞서 나온 상여 행렬을 볼 때와는 달리 어쩐지 지옥이 연상된다. 많은 종교에서 지옥은 살아있을 때 악행을 많이 한 자가 죽어서 가게 되는 가상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때로는 그저 살아가는 게 지옥이다. 불안정해 보이는 세 사람은 각자의 지옥에 갇혀 있다. 저승사자의 실수로 죽을 나이가 아닌데도 저승에 가게 된 동주가 보고 겪는 일은 이 세 사람의 지옥을 이룬 것들을 살피는 여정이다.

그렇게 관객에게 전달되는 세 명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동주의 할머니는 일본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이며 동주를 따라다니는 여자는 성상납을 요구당한 끝에 자살한 배우이다. 동주는 그 배우가 성상납을 하던 자리에 있던 목격자이자 방관자이다. 각자의 지옥을 펼쳐 보였으니 다음 과제는 이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극의 초 중반까지 강렬한 화두를 던지던 연극은 문제를 해결하는 지점부터 조금씩 혼란을 빚는다.



두 명의 피해자와 한 명의 방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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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있었던 사건을 작품에서 다룰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역시 피해자를 그리는 방식이다. <빨간시>에는 두 명의 피해자가 등장한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인 동주의 할머니와 성상납 요구 끝에 자살한 여배우다. 많은 미디어 속의 피해자가 수동적이고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반해 두 사람은 입을 열어 자신을 이야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실이 아닌 기억 속이라지만 담담히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는 할머니는 피해자라는 닫힌 역할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극 속에 존재한다.

유서를 남긴 배우 역시 말하는 존재다. 그녀는 현실에서는 유서를 통해서, 저승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피해 내용을 진술한다. 다만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며 하얀 옷을 입은 배우와 검은 옷을 입은 배우가 함께 나오는데 흰 옷을 입은 쪽은 자신을 '눈처럼 순결한 겨울의 꽃, 설화'라고 일컬으며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데 비해 검은 옷을 입은 배우는 현실에서 겪은 피해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성범죄를 다루는 이야기에서 흔히 등장하는 '본래 순결했던 피해자와 사건 이후 더렵혀진 피해자' 의 잘못된 이분법적 구도를 연상시킨다. 배우의 자살을 둘러싼 논쟁은 한 신인배우의 인권이 권력과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기 때문이지 순결과는 관련이 없다. 굳이 검은 옷을 입은 배우와 흰 옷을 입은 배우를 함께 등장해 피해를 진술할 필요가 있었는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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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주인공인 동주의 역할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로 저승에 가서 할머니의 회상과 여배우의 폭로를 이끌어낸다. 동시에 할머니의 손자이자 여배우의 피해 현장에 있던 방관자로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을 잇는 접점이자 관객에게 화두를 던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저승에 가서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침묵은 끊임없이 만담을 주고받으며 공백을 채우는 염라와 옥황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강조된다.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건을 작품으로 만들 때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닌 방관자를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효과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보다는 방관자에 이입하기를 자연스럽고 편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빨간시> 역시 그런 의도를 가지고 동주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극은 동주를 통해 관객에게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 동주가 변한다면 변하는대로, 끝까지 침묵하며 변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대로 말이다. 하지만 동주가 결말에서 보여주는 행보는 다소 애매하다.



흩어지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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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된 동주는 괴로워한다. 모든 것을 다 알고도 계속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말할 것인가. 동주의 내적 갈등과 함께 현실에서 동주의 집으로 자꾸만 찾아오는 기자들은 외적 갈등도 고조시킨다. 극의 끝으로 갈수록 동주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되살아난 동주의 마지막 행보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왠지 다시 살아난 후에 이곳에 와야 할 것만 같았다'는 그의 대사에는 여배우 자살 사건의 방관자로서 괴로워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와 자살한 여배우는 모두 여성으로서 불평등한 젠더권력에 희생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분리된 사건이다. 동주가 수요 시위에 참석하는 것이 자살한 배우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는 뜻이다. 처음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여배우의 서사는 할머니와는 달리 뒤로 갈수록 흐려진다. 분리된 두 가지 사건은 잠깐 접점을 가지는 듯 했으나 끝내 연결되지 못한다. 동주가 수요 시위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여배우 역을 맡았던 배우도 함께 등장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녀의 서사가 완결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다.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건 동주의 책임이다. 피해자 못지 않게 방관자가 극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면 그에 걸맞게 움직여야 하는데 동주는 그러지 못한다. 그 결과 방관자는 다른 의미를 형성하지 못한 채 그저 '괴로운 나' 라는 자아 속에만 머무르게 된다. 관객에게 던지려던 메시지 역시 자연스레 약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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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빨간시>는 충분히 강렬한 극이다. 피해자를 무의식적으로 몇몇 타자화하는 작품과는 달리 피해자가 주체적으로 이야기하기를 시도하는 극이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치유된다'는 연극의 주제는 언제나 유효하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시키는 일이 가장 먼저 행해져야 한다. 보이게 된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될 때 그 속에서 치유의 길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 앞의 같은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연극 식 '말하기'는 이미 쓰여진 글을 읽거나 만들어진 영상을 보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울림을 준다. 많은 관객이 강애심 배우의 독백을 들으며 눈물을 훔쳤던 것도 같은 이유이다.

연극이 후반부로 달려가며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다소 흩어졌지만 극 전체를 관통하는 빨강이라는 색만은 강렬했다. 그 색은 피해자의 고통이자 치유였고 동시에 관객에게 전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보지 않으면 편할 일을 애써 직시하는 일은 괴롭다. 눈이 아플 정도의 빨간색을 보는 게 그렇듯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직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넘어서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빨간시>를 통해 직시한 모습이 관객 개개인에게 변화의 방아쇠를 당길 것이라 믿는다.





<공연 정보>


공연일시 2018.4.20-5.13

평일 오후8시/토,일 오후4시/월요일 공연 없음

장소 나루아트센터

가격 전석 3만원

이용연령 12세 이상 관람 가능

문의 광진문화재단 02-2049-4730
극단고래 010-6686-1392 / gorae20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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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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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SH
    • 공감과 생각을 일으키는 글이네요..! 곰곰이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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