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북마크]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목소리, 극단 '하이카라' 서승연 연출가

글 입력 2018.05.02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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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트위터 캡처]



Editorial #1 침묵을 깬 사람들

미국 타임지는 2017년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깬 사람들’을 선정했다. 이 사람들은 바로 ME too 운동 불특정 다수의 주역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모여 침묵을 깼다. 그리고 침묵이 깨진 세상엔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무대 위 여성들도 침묵을 깨기 시작했다. 여성 서사가 부족하다고 공공연한 비판을 받아왔던 한국 공연계에, 제 이야기를 제 목소리로 노래하는 여성들이 등장한 거다. 아직 다음과 같이 말하긴 이르다. 그러나 감히 침묵을 깨고 말해보겠다. 2018년 공연계의 주역 역시 ‘침묵을 깬 사람들’이 아닐까. 무대 아래의 사람도 무대 위의 사람도 견고한 침묵을 깨부수어 틈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틈엔 세상을 변화시킬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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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페미니즘 뮤지컬 <모던 걸 백년사> 서승연 연출가 인터뷰

[Opinion] 뮤지컬 <레드북>과 여성 서사

     
누군가는 역차별이니 세상 좋아졌다느니 볼멘소리를 종일 쟁쟁댄다. 이제야 겨우 뗀 첫 마디엔 시끄럽다며 귀를 막는다. 그리고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바야흐로, 여전히.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어떤 이는 여성민우회를 팔로우했다는 이유로 사상검증을 당하고, 어떤 이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악플 세례를 받는다. 그런 세상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디어가 파는 여성 서사는 이 불균형한 현실을 교묘하게 은폐한다. 더 나아가 기만한다. 20대 여성의 지난한 삶은 한 아저씨의 따스한 시선과 맞닿아 휴머니즘을 만들고, 30대 여성의 혹독한 삶은 연인의 구원을 통해 로맨스로 서사화된다. 팔리는 이야기를 내놔야 하는 방송국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얘기겠지만, 한 번쯤 되묻고 싶다. 이게 정말 동시대 여성의 이야기인가.
 
공연예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 여성 관객의 비율이 전체 관객의 과반수를 훌쩍 뛰어넘지만, 여전히 재생산되는 건 남성 중심 서사다. ‘여성의 이야기는 뽑히지 않는다’는 공모전 ‘썰’까지 떠돌 지경이다. 불균형의 문제는 줄곧 지적되어왔으나, 그때마다 합죽이가 됩시다, 합! 하며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침묵은 기만과 무시로 무장하여 제 카르텔을 다지기 바쁘다. 반기를 들면 윽박질러 다시 조용하게 만든다. 공포정치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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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했던가. 침묵은 영원하지 않다. 이 침묵 속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이야기하자 또 한 사람이 이야기한다. 결국, 침묵은 깨지고 세상은 시끄러워진다.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 흔해 빠져야 할 서사이지만 정말이지 흔치 않았던 여성 서사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 거다.
 
눈에 띄는 작품이 몇몇 있다. 그 중 ‘페미니즘 뮤지컬'이란 수사를 앞세운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가 먼저 눈에 들어찬다. 이 작품은 동시대 한국 여성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희귀한' 뮤지컬로 그때 그 ‘모던걸’과 지금 여기의 ‘김치녀’를 소환해낸다. 그리곤 그들이 처했던 남성 중심 사회문화와 그 속에서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모습을 충실히 서사화한다. 1918년 모던걸 경희와 2018년 김치녀 화영은 침묵을 깨고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한다. 부딪쳐 넘어지면서도 끝내 지지 않는다.
 
관객은 경희와 화영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며 우리의 이야기라고, 소리 높여 화답했다.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 하에, 학내 기획안에서 시작했던 작품은 클라우드 펀딩에 성공하고 시즌2 공연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렇담, 아니 들어볼 수 없겠다. ‘침묵을 깬 사람들’ 중 하나인 <모던걸 백년사>의 작·연출, 서승연 연출의 목소리를 경청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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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모던걸백년사 시즌2 @highcollar19]



<모던걸 백년사>의 시작은

 
Q. <모던걸 백년사> 시즌2 공연이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 아래 무사히 마쳤습니다.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모던걸 백년사> 연출/극작 서승연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관심에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공연예술이란 늘 관객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Q. 시작은 연출님의 학내 음악극 기획안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학내 기획에서 클라우드 펀딩 성공과 시즌2까지. 한 작품을 꾸준히 끌고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저희 공연이 사회의 이슈를 주제로 쓴 만큼, 가장 큰 원동력은 관객님들과 후원자님들의 응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저희 공연을 후원하시고 홍보해주시면서 적극적으로 저희 공연의 기획 의도에 공감해주셨어요. 이 공연이 여전히 필요하고, 다시 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 역시, 관객님들의 응원이었습니다. 또한, 시즌1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사회도 한몫했어요.
 
 
Q.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동시대 여성 서사를 만드셨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동시대의 20대 여성이었습니다. 제가 20대 중반의 여성이고, 저희 창작진의 대부분이 20대 여성인 만큼 우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우리의 눈으로 그리는 ‘우리’의 모습이 담겼으면 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교육을 받은 20대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20대 여성 중에선 그나마 가장 사정이 나은 축에 속하는 여성들임에도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 앞에서 취직에 애를 먹고, 또 취직이 되더라도 ‘사무실의 꽃’ 취급을 받게 되는 젊은 요즘 여자들. 또한, 그들 중 페미니스트인 여성들이 겪게 되는 갈등을 100년 전 모던걸들이 겪었던 비난과 함께 풀어내면서 우리가 결코 혼자 싸워온 사람들이 아니라는 위로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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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모던걸백년사 시즌2 @highcollar19]



속시원해서 씁쓸한 동시대 여성 서사


Q. 작품 내적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작품엔 ‘하이퍼리얼리즘’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인물과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공인 경희와 화영 캐릭터를 만들면서 참고했던 일화나 인물이 있을까요? 특히 경희 캐릭터는 나혜석과 김일엽을 참고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던데요.

네. 경희 캐릭터의 경우는 레퍼런스가 분명하게 있고, 실제로 나혜석 씨와 김일엽 씨의 소설, 수필에 나오는 글들을 차용하여 대사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캐릭터의 이름은 나혜석 씨의 소설 <경희>에서 따오기도 했습니다.
 
화영의 경우는 주변 친구들을 많이 참고했어요. 면접장에서 겪게 되는 성차별이나 취업 후에 겪게 되는 일들은 전부 제 주변에서 하나씩은 일어나고 있었던 경험담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오는 뉴스들 – 고학력 고스펙 여성의 하향 결혼 유도, 은행들의 취업 성차별- 등이 레퍼런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Q. 시즌 1 때는 화영이 대학생·모태솔로였던 설정이 시즌 2로 와선 전면 수정되었는데요. 수정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수정으로 인해 작품의 결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하고요.
 
지난 시즌에선 화영의 연애가 지금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이번 시즌에서 저는 화영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꿈과 신념을 위해 나아가는 인물로 설정되길 원했습니다. 또한, 제 주변에서 이제 많은 친구들이 취업을 준비하거나 회사생활을 막 시작하다 보니, 많이 듣게 되는 말도 회사와 취업에서의 성차별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화영의 설정도 자연스럽게 지난 시즌에 비해 나이가 더 있는 취준생이 되었습니다.
 
지난 시즌과 달리, 화영의 설정도 처음부터 페미니스트인 것으로 바뀌었죠. 그런 변화로 페미니스트로서 여성해방을 주창했던 경희와의 연결고리도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과 어렵게 취직한 일자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게 되는 과정 역시 공감대를 더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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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모던걸백년사 시즌2 @highcollar19]


Q. 로맨스 서사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요. 경희는 연인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화영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화영을 지지해주는 연인이 그의 곁에 머무는 결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두 서사의 결말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라고 하면 우리가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 것 같았어요. 두 사람의 결말을 다르게 설정하여, 그래도 우리가 조금은 변화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Q. 여성 캐릭터의 면면을 다양하게 보여주신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경희의 언니나 화영의 친구나, 남성 중심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여성상도 작품에 담으셨던데, 작품 속 이들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구축하는지 궁금합니다.
 
이들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여성들을 비난하기보단 있는 그대로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들이 이 사회에서 적응하기 위해 포기한 것들. 그리고 삶의 방식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 여성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건. 이 사회라는 구조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화영 친구의 경우도 소위 ‘결혼 잘해서 직장 그만두는 것을 꿈꾸는 여성’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상 그녀가 사무실에서 받는 월급과 취급을 보면,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답이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녀들의 삶과 선택을 보여주면서 사회의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Q. 공연 시작 전에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공연 끝난 후에는 넘버 ‘요즘 여자’가 하우스 음악으로 나오더라고요. 작품 속 ‘모던걸’과 ‘김치녀’가 이어지는 것처럼, 하우스 음악 역시 이어지는 건가요? 의도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네. 의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심덕 씨 역시 나경희라는 캐릭터의 레퍼런스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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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모던걸백년사 시즌2 @highcollar19]



1918년, 2018년 그리고 2118년 여성


Q. 1918년 경희와 2018년의 화영을 보며 100년 뒤인 2118년의 여성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작품은 낙관적인 스탠스를 견지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담 2118년 한 여성의 삶은 화영의 삶보다 진일보해 있을까요? 연출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진일보해있어야겠죠? 그리고 2018년의 많은 화영들이 그렇게 만들 것이고요. 1918년의 수많은 경희들이 2018년 화영의 삶 – 학교도 다니고, 취업도 할 수 있고 호주제도 없는 삶을 만들었듯이, 수많은 2018년의 화영이들이 차별 없는 삶을 사는 2118년 여성들의 삶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해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왜 싸우겠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모든 부당한 것들이 변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닐까요. 개인적으로는 2118년의 여성들은 이런 뮤지컬이 필요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Q. 공연계 내 여성 서사 부족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신 듯하여,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됩니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앞으로도 하이카라는 쭉 한국의 여성 서사를 이야기하고자 해요. 알려지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나, 지금 내 옆에 살고 있는 동시대의 여성들의 모습을 여성의 관점에서 그려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꼭 선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비열하고 권력욕 있는 여성 캐릭터 같은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모던걸 백년사>의 관객 여러분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모던걸 백년사>의 관객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여성 창작진들, 또 여성 서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주셔서 정말 큰 힘이 되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희 공연이 2시간 동안 관객님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했길 바랍니다. 경희의 대사를 차용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희곡으로 저희 창작진이 말하고자 한 바가 “우리 사회에 들불처럼 번져나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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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곳곳에서 서승연 연출가의 신념이 느껴졌다. 관객들이 하이카라의 행보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것 역시 당연해보인다. 동시대 ‘나’의 목소리를 담고자 애쓰는 창작진의 모습에 어느 관객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나. 침묵을 깬 목소리, <모던걸 백년사>는 그리고 하이카라는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에 발맞춰 세상도 함께 바뀔 것이라 믿는다.
 
연출가의 답변대로, 1918년 수많은 경희들이 2018년 화영의 삶을 만들어냈듯, 2018년 수많은 화영이들은 2118년 어느 누군가의 진일보한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차별과 고통과 눈물을 삼켜버린 침묵은 반드시 깨야 하는 법. 앞으로도 목소리는 “들불처럼 번져나가”, 세상은 조금 더 시끄러워지고 요란스러워 질 것이다. 이 인터뷰도 시끄러움 중 하나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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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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