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아직 평화를 사랑하고 있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5.0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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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완전한 비핵화와 종전 계획이 선언되었다. 학교에서, 기차역에서, 프레스 센터에서, 시청 앞에서 중계되는 회담 결과를 보고 많은 시민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회의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감격하며 평화로의 전진을 반긴 것은 사실이다. 또한 남북이 군사분계선 일대 모든 적대 행위 수단을 철폐하고 북한이 표준시 변경을 추진하는 등 양측이 가시적인 변화의 자세를 취하면서 실질적인 관계 향상에 좋은 전망을 예고하고 있는 바이다.
   
 남북 관계의 호전 양상은 올해 초 겨울, 평창올림픽에서도 비쳤다. 한반도기를 흔들며 공동으로 입장하는 선수들의 하나 된 모습을 보며 눈물지었고 하키 단일팀이 올림픽이 끝난 후 눈물을 흘리며 생이별을 겪는 모습을 보며 분단의 아픔을 체감했다. 사실, 이렇게 평화의 감격을 경험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에 단일팀 구성이나 남북 공동입장에 관한 주장이 나왔을 때도 그것을 반기는 이는 썩 많지 않았다. 우리가 자력으로 얻어낸 개최권인데, 왜 엄연히 다른 나라와 그 영광을 나눠 가져야 하냐는 것이다. 북한은 그렇게 그저 ‘다른 나라’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은 정말 평화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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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당시
공동입장하는 남북 올림픽 선수들



천박한 시대


필자의 또래에 통일을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 아무리 통일 구호를 짓고 포스터를 그려도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가난한 북한 사람들의 경제적 부담을 지기 싫었고, 미사일이나 쏘아대는 폭압적인 체제와 그에 종속된 인민들과 뜻을 같이하고 싶지 않았다. 사이좋게 지내자는 외침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고, ‘나’의 일부를 떼어주는 무조건적인 희생에 불과했다.
   
시대는 그렇게 평화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북한과의 관계에서뿐이 아니었다. 행복의 기준은 ‘나 자신’이 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면 바보가 되었다. 내가 올라서야 했고 누군가를 눌러야만 했다. 인간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부유하던 수많은 차별과 혐오는 인터넷상에서 언어와 문화의 이름으로 집약된 채 다양화된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이되었다. ‘김치녀’, ‘된장녀’, ‘전라디언’…. 그것은 주류 문화가 되었고 시대의 보편이 되었다. 그렇게 문화는 일종의 권력을 갖고(혹은 권력에 의해) 천박한 시대정신을 양산했다.
 
문화의 탈을 쓴 폭력과 차별이 횡행하는 가운데 자연히 소외되는 문화도 발생했다. 책을 소개하고 문화유산을 탐방하며 사회적 약자에게 눈을 돌렸던 다양한 소재의 예능 프로그램은 한정되고 진부한 주제만 되풀이했다. ‘웰빙’을 추구하던 문화는 ‘힐링’을 바라보았다. 풍부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이, 고된 삶을 어떻게든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으로 전환된 것이다. 향유하는 문화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사람들의 시야 역시 좁아지기 마련이다. 경제수준은 올라가고 매체는 발달했으며 정보 접근성도 높아졌지만, 사람들은 왠지 더 고달픈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시대의 변화


가장 기본적인 정신적 가치가 도외시되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리 없다. 온갖 차별이 문화화 및 정당화되어 평등의 가치를 깔아뭉갠 것처럼, 공권력의 물대포와 블랙리스트는 자유의 가치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반대진영에 가해지는 것은 도발일 뿐, 평화의 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도 어른들은 방관했고 언론은 가짜 뉴스를 양산하며 사망자의 보험금을 계산했다. 추악한 사회의 단면이 폭로되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단순히 정치권력에의 저항이 아니었다. 인간의 본질을 완성하는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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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단지 특정 정치권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명시적인 목적이긴 했어도, 1,700만 명의 인원이 바라는 지향점이 모두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력에 의해 훼손된 가치들, 옳지 못한 것처럼 배워왔던 옳은 것들, 실질적인 이익이 되지는 않지만 인류가 기반 삼아야 할 원리·원칙들을 회복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양심에 따라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한 삶의 궤적이 옳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평화를 동경하다


그 결과가 어찌 됐든 국민은 가장 신사적인 방법으로 지도자를 끌어내리며 민주주의의 원리를 멋지게 실현시켰다. 시대가 바뀌며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도 달라졌다. 필자는 이러한 전환이 북한을 대하는 방식의 변화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견해로 비칠까 염려되지만, 여기에서 변화의 주체는 국민을 가리키니 무리 없다. 국민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올림픽 선수들을 보며 한민족의 가치를 목격했고 전쟁의 종식 가능성에 벅찬 희망을 느꼈다. 통일을 바라지 않았던 또래들은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하게 되면 원조 평양냉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다. 철도가 개통되면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유럽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소식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게 한다. 어떻게 이들은 평화를 지향하게 된 것일까?
   
사실, 우리는 원래 평화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감동과 벅참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러나 평화가 무언지 정확히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고 설사 그것을 추구하면 불이익밖에 주어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안보 위기에 대한 해답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하면 가차 없이 ‘빨갱이’라는 낙인이 주어지는 시대에서 어떻게 평화를 외칠 수 있었겠는가? 전쟁을 막기 위해 나 자신의 이익을 어느 정도 떼어줄 수 있는 용기, 그것이 평화의 핵심이다. 평화뿐이 아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시대가 전환되고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자유와 평등을 향한 발걸음은 더욱 역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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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은 그 시대의 주가 되는 힘을 반영한다. 그것이 정치권력이든, 언론의 권력이든, 주체 된 국민들의 권리이든 말이다. 국민들 마음속 깊이 내재하여 있던(혹은 방치되어 있던) 가치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국민의 주권이 비로소 존중받기 시작하는 시대에서,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가치일지라도 그 인간성은 계속해서 힘을 갖고 시대를 빛냈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한다.



자료 출처 한겨레,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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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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