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공녀(microhabitat) : 나의 안식은 자유에 있다 [영화]

글 입력 2018.05.03 02:0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한 잔의 위스키와 같았다, 그는. 위스키는 독한데, 잔은 금방 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마치 담배 연기와도 같았다. 순식간은 아니지만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피어오르다 이내 강렬한 잔향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는 매일 오직 한 갑의 담배와 한 잔의 위스키만으로 세상을 표류한다. 놀랍게도 그는 위스키만큼 독하고 담배처럼 진했다.


꾸미기_3c91dac70e7bb534ec297ff4f4f8a6d8328863e8.jpg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조금 쉽고 진부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우선 재미있게 봤고, 또 인상 깊게 봤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영화를 만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따라서 이 영화가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승전결이라는 진부한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옴니버스 형식을 차용했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또한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주인공의 뚜렷한 개성이 주는 재미에, 조연들 하나하나가 지닌 각양각색의 성격과 사연들이 적절히 얽혀 영화의 맛을 더한다. 거기에다 자칫 무겁고 어둡게 다가올 수 있는 메시지임에도 그 무게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끔 유쾌하게 풀어내는 내공에서도 작은 감탄이 일었다.

이상이 이 영화의 재미였다면, 두고두고 이 영화가 생각나게 하는 ‘인상 깊은 점’은 조금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물론 재미도 훌륭하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만의 진한 인상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보려 한다. 이 영화가 갖는 독특한 매력은 당연하게도 주인공의 개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의 개성 넘치는 삶 자체가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단순히 감독이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주장뿐만 아니라, 답을 내리지 않은 채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과 생각해 볼 거리들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작품에 대한 감상을 활자로 옮기는 것이 그렇게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이 가진 메시지는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분명 이 메시지는, 이 작품만의 매력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절대 옅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영화의 내용이 많이 포함된 글입니다



소공녀[小空女], 가장 작은 공간에 살다


제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우선 영어 부제는 ‘microhabitat’. 작은 거주지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용어로는 미소생물이 서식하는 ‘미소환경’을 지칭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이름 ‘미소’가 단지 smile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한국어 제목의 경우 필자는 동명의 소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많이 없었는데, 함께 영화를 본 사람으로부터 이 영화의 소공녀는 소설 제목과는 달리 小空女, 즉 작은 공간의 여자일 것이라는 좋은 해석을 전해 들었다. 이 영화에 정말 훌륭하게 들어맞는 해석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집에 산다. 아니 실은 집이 없다. 그가 몸 뉘는 공간, 오직 그의 몸 하나 크기만큼의 작은 공간이면 어디든지 그의 집이 된다. 집보다는 차라리 서식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도 같다.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그의 서식지는, 단칸방 하나 구하기도 힘든 이 도시에서의 팍팍한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감독도 제작 동기를 밝히며 말도 안 되게 치솟은 서울 집값에 화가 나 이 작품을 만든 면이 있다고 말했다. 즐거운 나의 집. 그런데 나의 집을 얻기까지 가는 길이 여간 험난한 게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공간에 서식하는 우리의 주인공은 오히려 현실의 험난함으로부터 자유롭다. 아니 어쩌면 가장 작은 공간만을 가졌기에 가장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내 집 마련'을 쫓아 고군분투하는 대신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쫓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남들 눈에는 노숙자지만, 스스로에게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행자인 이 매력적인 주인공을 지금부터 만나보자.


 
흔들리지 않는 당돌함


주인공 미소(배우 이솜)는 남들과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춥고 좁은 단칸방에서 가난한 살림으로 살아가지만, 매일 한 갑의 담배와 한 잔의 위스키를 위해 가사도우미 일로 버는 일당을 쓰고 나면 모이는 돈은 없다. 그러던 중 해가 바뀌고 물가가 오르면서 집세며 담뱃값이며 술값도 모두 오른다.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는 대신 집을 버리는 쪽을 택한다. 대학 시절 함께 밴드를 하던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면서도 담배와 술은 꼬박꼬박 자신의 삶에 챙겨 넣는다.

좋은 말로 독특하고, 나쁜 말로는 한심한 인생이다. 한 친구는 대놓고 한심하다며 그에게 면박을 준다. 술 마실 돈 담배 필 돈 아끼면 작은 집이라도 마련하겠다고.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다. 그의 안식은 집이 아니라 담배와 위스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생각과 조금 다를 뿐, 그는 확고하게 자기만의 안식처를 갖고 있다. 카페에서 노숙 아닌 노숙을 하고 공중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아도, 그는 여전히 “지금이 좋다”고 말한다. 이 흔들리지 않는 당돌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세상의 굴레를 내던진 그는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꾸미기_3cbefeb3b4f9f6ee71b7074af22e78e89706d9dc.jpg
 

물론 그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친구마저도 그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친구는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자신과 미소 모두 안정적인 삶을 살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자친구는 자신의 꿈인 웹툰 작가를 단념하고 공장 해외파견에 지원한다. 당연히 미소는 반대한다. ‘안정적인 삶’은 남자친구의 꿈을 포기할 만큼, 또 서로가 함께할 시간을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자친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지만, 미소는 다시 꿋꿋하게 이 도시를 살아나간다. 작은 방 하나 없이, 대신 담배와 위스키만으로 말이다.

주인공에 대해 또 다른 독특한 설정이 있다면 바로 머리카락이 하얘지는 병이다. 병을 막기 위해 미소는 매일 약을 챙겨먹는데, 벌이가 시원찮아지자 그마저도 포기했음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하얘지는 그의 머리칼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백발의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위스키를 마시는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남들은 어떻게든 검게 칠하려는 와중에 너무 일찍 하얘져버린 그의 머리칼은, 이상하고 눈에 띄고 그래서 개성 뚜렷한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꾸미기_5f01b2acc6fb3222aa25c88961a363b79a0182f6.jpg
 


집을 갖고 안식을 포기한 사람들


미소가 찾아간 친구들은 함께 했던 밴드는 이제 잊고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같이 울고 때로는 비판도 하게 되는 그들의 삶은 지금 우리들이 사는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어딘가 한 군데씩 비어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미소의 삶이 가진 충만함에 비해서는 말이다. 불행, 허무, 외로움, 부자유 등 여러 단어들로 그 빈자리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집을 가진 대신 삶의 중요한 한 귀퉁이를 떼어버린 것이다. 

안식은 안락과 다르다. 집이 주는 안락함 속에 반드시 영혼의 안식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어쩌면 물질적인 안락함보다 정신적인 안식이 우리에게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정신의 안식과 물질적 안락은 함께하기보다는 상충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신의 안식, 영혼의 자유를 포기하는 쪽이 선택된다. 물론 포기한 자유만큼 물질적 안락 역시 큰 가치가 있으며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은 맞다. 그러나 포기의 정도를 꼭 세상의 기준에 맞춰야 할 필요는 없다. 누가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자기만의 안식을 지키며 사는 미소의 모습을 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유가, 그리고 그 자유를 향한 용기가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미소는 친구들의 집에 머물며 그들의 마음 속 빈자리를 채워주고 간다. 그가 가진 유일한 재능, 가사도우미 일로 말이다. 새집처럼 청소를 해주고, 반찬거리를 한 가득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집을 떠날 때에는 같이 밴드 연주를 하던 옛날 사진이나 짧은 편지를 꼭 남긴다. 한 장 종이에 담긴 그 마음은 한없이 깊었다.


꾸미기_7843f01bc1554b76276ec444b8e0fb36fb219bc7.jpg
 




멋있다. 밴드하던 시절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생긴 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담배 한 개피에도 멋이 서리고 술 한 잔에도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게 단지 허세가 아니라는 점이 그를 더욱 멋있게 만든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한 뒤 지독한 가난을 버텨내면서도, 자신의 자유를 끝내 지키고 누리는 그의 모습에서 마음의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위대한 사람,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조금 궁상맞고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도 위스키 한 잔을 비운 뒤 조용히 현금을 놓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는 오직 짙은 자유의 냄새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김해랑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