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 속에 녹아 있던 것들 [도서]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글 입력 2018.05.0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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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속에 녹아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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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부터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이유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왠지 부자가 된 기분,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실제로 그 책들을 다 읽지는 못해도 책더미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애매하게 시간이 남을 때면 저절로 서점을 향해 발길을 돌리게 된다.

 그 날은 꽤 오랜만에 영풍문고에 들렀다. 30분 정도 남은 약속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 간 것인데, 또 지름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나올 때 책을 손에 쥐고 나왔다. 그 지름신을 불러 들인 책이 바로, 『책 읽어주는 남자』였다. 처음엔 그저 잠깐동안 읽을 책을 찾으러 해외소설 코너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다가 눈에 밟히는 표지에 책을 집어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제목에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초반 쯤 읽으니 가볍게 읽을 만한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성장 소설 쯤 되는 것 같았다.

*

 한 소년이 질병으로 인해 학교를 쉬던 도중 연상의 여인을 만난다. 소년은 거의 한눈에 여인에게 반하고 치료를 하는 기간동안, 그리고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서도 여인을 찾아가 '사랑인듯 묘한 관계'를 지속한다. 이렇듯 1부는 단순하게 한 소년에게 영향을 끼친 연상의 여인을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2부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소년의, 여인에 대한 단순한 동경이나 애정 뒤에 가려진 독일사의 조각이 끼어들었다. 소설 속의 '나', 미하엘 베르크는 대학에 간 뒤, 한 법률 세미나에 참여한다. 그리고 일종의 프로젝트로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독일에서 자행되었던 비극을 심판하는 법정에 방청을 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인사 한 마디 없이 떠나갔던 자신의 연인, 한나 슈미츠를 만난다. 다른 누구도 아닌 피고인으로 말이다.

 한나는 나치 지배 당시 여성 유대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물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감시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녀의 일은 단순히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것 뿐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아우슈비츠로 보낼 유대인들을 골라 그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해야만 했다. 재판 과정에서 감시원들이 했던 일들은 낱낱히 밝혀졌고 미카엘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괴로워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범죄자였다는 혼란과 그녀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때문에. 그러면서도 어줍잖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죄를 더 뒤집어쓰는 그녀를 돕고 싶은 충동 때문에. 하지만 한나는 결국 종신형을 선고 받고 그는 더이상 그녀에게 관여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몇 년이 지난 후 미하엘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책 읽어주는 행위'로 한나에게 소식을 전한다. 10대 시절, 책읽고 샤워하고 관계를 가지던 그들의 일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한 권으로 시작한 두 사람의 책 읽기는 계속 되었고,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한다. 결국 한나는미카엘에게 영원한 족쇄처럼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녀의 '꼬마'였을 때부터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말이다. 한 소년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 그녀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신을 꼬마라 부르던 그녀 덕분에 그녀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정신적 유대감을 얻었고, 나치 시대에 관여했던 그녀로 인해 자국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자문하고 괴로워했으며, 감옥에 들어간 그녀를 위해 책을 읽으며 온갖 서적들과 시들을 외워버렸다. 그리고 한 여인은 한 소년을 만나 글을 배우고 삶을 살아갈 의지를 가지만 역시 그 남자로 인해 스스로 삶을 끝낸다. 그녀와 그의 묘한 관계 속에 사랑과 역사적 슬픔이, 그리고 이를 둘러싼 세대의 갈등도 녹아있었다.

*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세상은 한 가지 모습을 하고 다양한 색채를 뿜어낸다. 한나가 겪었던 일생과 미카엘이 겪었던 세상은 같은 듯 다르고, 나치 시대를 겪었던 세대가 그 후 세대는 같은 것을 다르게 바라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다르다. 그 차이를 풀 수 있는 열쇠는 결국 대화 뿐이다. 한나와 미카엘은 '책 읽기'를 통해 서로를 연결시켰지만, 미카엘은 한 번도 한나에게 사적인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한나의 소식을 듣고, 그녀가 글을 배운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편지 한 통조차 쓴 적이 없다.

 이 대화의 단절은 결국 한나를 자살로 내몰아 버린다. 편지 한 통조차 쓰지 않는 그에게서 그녀는 더 이상 사랑스럽던 자신의 '꼬마'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카엘이 그녀에게 진정으로 대화를 청했다면 한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대화는 모든 차이을 푸는 시작이다. 이 작은 행위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_ p.238 
 
"그녀는 당신과 더불어 글 읽기를 배웠어요. 도서관에 가서 당신이 카세트에 녹음한 책들을 빌려 와 귀로 들은 내용을 낱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그대로 좇았어요. 카세트 녹음기는 켜기와 끄기, 앞으로 감기와 되감기를 계속 하는 바람에 오래 견디기 못하고 자꾸만 고장이 났지요. (중략) 그녀는 또한 그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꼈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했어요." _ p.258

"그녀는 당신이 편지를 써주기를 정말로 고대했어요. 그녀는 오직 당신에게서만 우편물을 받았어요. 우편물을 나누어줄 때면, 그녀는 '나한테 온 편지는 없어요?'라고 물었지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는 소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왜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_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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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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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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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bswnrl
    • 서점이 왜 좋으냐 물으면 정확히 말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첫 번째 문단 표현이 딱이었네요 !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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