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꺼이”, 원하는 건 그것 뿐

글 입력 2018.05.0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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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만나는 일이 설렘보다는 신중함의 대상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신중함의 밑바닥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깔려있다. 철없던 지난날의 잘못들, 그럼에도 계속 반복되는 실수들, 이어지는 자책. 상처만 남기고 발을 빼는 일이 쌓이고, 기억을 덮는 비겁함은 두려움이 되어 다시 나를 찾아온다. 언제부터인지, 자꾸 예측가능한 곳에만 삶을 묶어두게 된다. 겁이 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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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대단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들이라고 겁나지 않았으랴. 긴 시간 동안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너무나 우연히 만나 결국 서로의 구원이자 지지대가 된다.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상대의 모난 부분까지 모두 알 만큼 오랜 시간동안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온 그들이었다. 이런 그들의 관계에서 예측 가능한 방향은 이내 헤어지는 쪽이다. 자신의 안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혹은 또 다른 상처를 받는 게 두려워서, 어쩌면 그냥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게 성가셔서. 그러나 두 사람은 예측불가능한 쪽을 택했고 끝없는 불확실성 속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졌다.



필요보단 느낌, 느낌보단 용기


두 인물 모두가 매력적이었지만 심정적으로 조금 더 공감이 가는 쪽은 알렉스였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 일부러 단조롭게 만든 일상, 취미는 오래 걷기. 과묵하고 무뚝뚝한 만큼 감정을 숨기고 쌓아두는 것도 잘한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 익숙하지만 상대가 편해지면 묻지 않은 것도 신나게 늘어놓는 그의 모습에서 내 과거와 현재가 언뜻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이런 성격과 생활을 만든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어린 시절 겪은 아픔과 치유되지 못한 채 묻어 놓은 상처 때문이다. 그 깊은 상처까지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역으로 이런 나를 만든 상처는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또 다른 인물 조지는 아무래도 알렉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자신의 생활이 확고한 알렉스에게 조지는 그 생활을 근간부터 흔들어놓는 커다란 불확실성이다. 조지를 삶 속에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알렉스에게 조지는 다소 귀찮고 부담스럽고, 사실 많이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와는 너무 다른, 아니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적에 대한 공포증이 있나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재잘대고, 그나마도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얘기들뿐이다. 심각한 조울증과 경미한 허언증을 겸비한 채, 완전히 제멋대로 인생을 사는 조지와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알렉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에게 끌린다.

서로 반대되는 성격이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이 둘은 반대보다는 상극이라고 답하고 싶다. 적어도 알렉스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조지가 있는 것 보다 없는 게 훨씬 편하고 안정적인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직 서로에 대한 끌림, 그 불투명하고 내면적인 끌림이라는 행운이 있었기에 상극인 상대를 삶 속에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용기이다. 아무리 마음이 끌린다 해도 결국 상황을 만드는 것은 느낌이 아니라 의지이다. 상대와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당연히 용기가 필요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더한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알렉스와 조지는 오직 자신의 마음이 지시하는 곳을 향해서 용기를 냈다. 특히 알렉스는 오직 조지라는 이유로 영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여태까지의 모든 ‘안정’을 버린 채 기꺼이 조지를 따라 미국으로 떠난다. 그런 알렉스에게 조지는 말한다. 오직 ‘기꺼이’, 그 마음만 있으면 자긴 충분하다고.



평범하고 특이하게


사실 극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굉장히 평범하고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 극에는 어딘가 특이한 요소들이 있다. 시작부터가 그런데, 보통의 경우처럼 극의 시작을 알리는 조명변화가 없고 객석과 무대 조명 모두 환하게 켜진 채로 배우가 들어와 극을 시작한다. 또한 장면을 전환할 때 배우가 등·퇴장을 하지 않고,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모습을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의도적으로 이질감이 느껴지게 하려는 장치가 아닌가 싶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 극이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이다. 배경음악은 작중 상황상 필요한 게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탱고 장면 역시 음악이 없다. 정적 속에서 오직 두 사람의 발소리와 웃음만으로 채색되는 무반주 탱고는 그 낯설음만으로도 주의집중을 사로잡는다. 음악이 들리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은 다르다고, 알렉스가 말했던가. 음악 없이 오직 대사와 행동만으로 채워진 이 극은 관객에게 대사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관객이 대사를 듣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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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평범하면서 특이한 연극은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 그렇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평범한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저마다 특이하니까. 노래며 소설이며 연극까지 뻔한 사랑 타령한다고 욕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랑 타령이 자기 이야기가 되면 더없이 특이하고 특별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 관계는 더욱 묘하다. 이 ‘묘함’은 사는 데 꼭 필요하진 않지만 그 필요를 능가하는 마음의 끌림을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의 용기를 갖게 한다. 그건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불편과 시련을 모두 감수하고서라도 불확실성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겠다는 미지(未知)의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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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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