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디어 마이 프렌즈 : 기적을 걷는 시간 [기타]

글 입력 2018.05.12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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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나, 얘들아?
내일이 바로 ‘그 날’이야!”

 
며칠 전,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비행기에서 내려 톡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날’이라 함은 어언 15년 전, 초등학생 아이들이 15년 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러자 내 방구석 어딘가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목걸이가 번뜩 떠올랐다. 나는 그 목걸이가 어디 있는지 단번에 기억해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목걸이를 꺼내 괜히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큰 스퀘어와 작은 스퀘어 장식 두 개가 엮인 목걸이였다. 작은 스퀘어 뒤에는 우리의 약속이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2018년 5월 5일 12시 00초등학교"

원래 장소는 캐나다로 갈 친구를 위해 '나이아가라 폭포'였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도 현실을 고려하자며 초등학교로 바뀐 것이었다. 그 때의 일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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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징표였다. 한 명의 친구가 캐나다로 떠나는 날을 며칠 앞두고 갖게 된 목걸이는. 정확히 말하면 송별회 날 각자가 준비한 선물 중에서 이 목걸이는 한 친구가 준비한 선물 중 하나였다.


*


목걸이를 준비한 A는 무리의 리더 격이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A의 부모님 덕(?)에 우리는 매일같이 A의 집으로 모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자주 만나고, 몸을 부딪치며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A의 입을 빌리자면 그녀는 "일을 벌이기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는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했던 모든 '놀이'는 A로부터 출발했던 것 같다. 아이돌 가수 생일파티 준비하기, 인터넷 소설 쓰기, 가요 안무 따라하기 등등. 심지어 15년 전 약속을 유일하게 기억해낸 사람도 A인걸 보면 지금도 여전히 무리를 이끄는 리더인 셈이었다.

그렇게 모여 '우리'가 아니었다면 쉽게 경험하지 못했을 추억을 얘기하는 일은 즐겁기도, 아련하기도 했다. 우리가 놀 수 있는 다양한 컨텐츠를 양산한 A는 섬세했고, 당시 캐나다로 간 B는 잘 삐졌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C는 잘 울었고, 그런 B와 C를 답답해했던 나는 잘 화냈다는 기억을 끄집어내 서로 웃었다. 이토록 자기주장 강한 성격을 자랑하는 각자가, 그러나 A가 제안하는 놀이에는 군말않고 모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어쩌면 다들 그런 '끼'가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니겠냐는 추측 혹은 추론을 내놓으며.

특히 어떤 이유로 우리는 꽤 흥분한 상태였다. 비록 '이 날'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캐나다에 있던 B가 약속한 날짜에 맞춰 한국에 잠시 들어오게 된 것, 나 또한 원래 긴 여행을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약속 전날 여행을 마치게 된 것, 서로 다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오래 전 약속은 막연한 것이었다. 각자는 오랜 시간 그 약속을 몇 번은 기억해냈을 것이며, 몇 년은 그 약속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래서도 이 날은 사람의 힘만으론 찾아왔다고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날이었다. 우리가 의도했으나, 의지만으론 이룰 수 없었던 그런 기적같은 날. 철없고 어렸던 우리가 욕심 없이 했던 약속이 어느새 "이 날이 꼭 오리라"는 예언으로 둔갑한 것 같았다.


*


함께했던 한 시절, 서로의 시간은 구분할 필요도 없이 아주 닮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었고, 돌아올 수 없는 듯 했다. 그런데 여기에 몇 가지 우연이 덧대어져졌다. 그러자 다시는 같아질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각자의 시간이 정확히 한 곳에서 만나 강한 촉수가 되어 검은 기억의 막을 갑자기 뚫고 나온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15년의 시간은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이기도, 눈 깜짝할 새에 스쳐간 시간이기도 했다. 시간의 위력이 실감나 한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어쩌면 느낌만 갑작스러웠을 뿐일지 모른다. 서로의 시간이 아주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중에도 함께 지냈던 시간은 완전히 잘려나가지 않고, 우리 뒤를 열심히 좇아오고 있었다면 말이다. 실재한다고 믿는 시간 저 밑에 또 다른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추억은 추억으로만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의식적으로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걷다가 무의식중에 도착한 곳이 같은 장소일 수 있도록, 시간은 그런 소리 없는 위력을 발휘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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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연락을 받고 생각보다 반갑거나 기쁘지 않았다. 15년 전 '그 날'을 약속할 때, '그 날'에는 우리 모두 멋있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설렘이 세월에 대한 무지 속에 뭉게뭉게 피어올랐었다. 그러나 어릴 때 꾸는 꿈은 달콤하고 다 자란 뒤 꾸는 꿈은 씁쓸하다고 했던가. 어디서 본 문장이 딱 들어맞는 그런 달콤씁쓸한 감정이 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곱씹고 흘려보내니, 시간을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 큰 수확이다.


*


어렸을 당시 나는 늘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가지며 장래희망을 꿈꾸곤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주제는 '나' 였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의 공간이 없었다. 적성검사를 하면 ‘진취형’이 나왔고, 주위에서 ‘시간을 버리지 않는다’ 라거나, ‘열심히 산다’는 소리를 듣곤 했던 건 한편으론 오직 '나'를 위해 살았다는 사실의 반증이었다.

현재를 사는 법을 얼마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런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건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언제는 내 옆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친구들이 신기하기도 했다. 이기적인 나를 그나마 지탱해준 건 친구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 덕분인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그들을 더 섬세한 마음으로 살피지 않은 시절의 내가 부끄럽게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 그런 감정은 걸러져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을 사랑해야겠다는 결심이 남게 되었다.

친구들과 얼마나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지, 또 얼마나 오래 함께하는지, 혹은 얼마나 자주 보는지가 크게 중요한 것 같진 않다. 단지 서로와 함께 했었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런 시간을 쌓아갈 수 있다는 사실로 충분하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내가 미처 예기치 못한 기적같은 날들을 만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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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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