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공포', 이해할 수 없기에 이해할 수 있는

‘내일이 되면 오늘의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두렵다'
글 입력 2018.05.1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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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공포>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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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되면 오늘의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두렵다'
 

  연극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전에 내 자신에 대한 얘기부터 해볼까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나. 바로 나였다. 드미트리가 했던 말처럼, 나는 오늘이 되면 어제의 나를 이해할 수 없어졌다. 아마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나는 이해할 수 없을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미숙하고 실수했다. 이런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나 자신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생겼다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어느 순간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제의 나를 경멸했고 그런만큼 내 주변을 위해 애썼다. 하지만 때때로 그런 생각 너머, 그런 내 자신이 실로 이기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소름이 돋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타적이라는 이름 아래 이기적인 마음을 품고 있는 모습. 어느 순간, 그 것이 내 본심이라는 것을 깨닫곤 했던 것이다. 나는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나는 나도 몰래 주변을 돌아보곤 했다. 저 창밖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고, 또 누군가는 자기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신께 돌린다. 누군가는 나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되 경멸하며, 어느 누군가는 타인의 바구니에 자기 자신도 끼워넣는다. 마치 체홉극의 인물들처럼.
 

시놉시스
 
사할린, 유배지로 악명 높은 러시아 변방의 섬. 극중 주인공 안톤 체홉은 험난한 사할린 여행에서 돌아와 농장을 경영하는 친구 실린의 집을 방문한다. 결혼 전 배우 생활을 했던 실린의 아내 마리는 체홉을 반갑게 맞이한다.
 
체홉의 방문에 잇따라 실린의 집을 방문한 조시마 신부는 실린의 집에서 쫒겨난 하인 가브릴라를 다시 맡아달라 부탁한다. 차갑게 거절하는 마리. 조시마 신부는 가브릴라와 자신의 특별한 인연을 얘기한다. 때마침 돌아온 실린은 마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브릴라를 집으로 받아들인다.
 
실린과 체홉, 마리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실린은 체홉에게 기이한 내기를 제안한다.


  체홉이 극을 올릴 초반에는 사람들이 모두 체홉의 극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평을 내놓았다고 한다. 체홉극 속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한들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사랑이다. 혹은 곧 비참하게 끝날 사랑이다. 인물들은 각자 서로의 뒷통수만을 바라보고 있고, 틀어져있는 방향 방향에 아픔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제 갈길을 간다. 갈등이 빚어지면 빚어지는 대로,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지독한 아픔을 부르짖으며 저만의 길을 걷는다. 지루한 일상 속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황당할 수 있을만한 극이다. 왜냐하면 이런 제멋대로의 인물들은 현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니까. 체호프는 현실을 극으로 승화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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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 이 연극은 과거 사할린을 다녀온 체호프의 이야기라고 해도 무관할 정도로 체호프의 극과 견줄만하다. 체홉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창작 ‘체홉극'. 그 이름에 걸맞게 완성된 듯하다. 특히 인물 하나하나의 설정이 매우 체홉스러운데, 저마다 방향이 다른 캐릭터들이 특히 그러했다. 마을 전체가 우울에 빠진 듯한 모습, 그리고 그 속을 조금씩 삐져나온 각자의 본심들을 탁월하게 캐치해냈다.

  <공포>에 나오는 인물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매우 독단적이다. 마치 미워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현시대의 인간들처럼. 저들이 왜 싸우는지, 저들이 왜 아파하는지 그 본질은 관심없고 자기자신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처럼. 인물들은 남에게 빌고, 권유하고, 구원을 요청하지만 실은 다 제 욕심 채우기에 바쁜 사람들이다. 가끔은 죄책감에 몸부림치지만, 그 역시 자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울타리일뿐이다. 가끔은 이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기도 한다. 모든 것은 신의 자비, 혹은 신의 뜻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이 모든 상황은 신의 장난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자비로운 신이든, 장난꾸러기 신이든 독단적인 인간의 내면을 밖으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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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공포>는 어떤 극이었냐면,
  독단적이고 이기적이며 밖으로 탓을 돌리는 인물들이라는 비난 아닌 비난을 쏟아냈지만, 사실 그 모습은 나 자신이다. 매일을 두려워하지만 매일을 살아가는 나 자신. 지나온 어제가 원망스럽고 다가올 미래가 두려운 나 자신. <공포>는 그런 극이었다. 나 자신,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을 연구해 풀어온 체호프에 대한 극. 그렇기 때문에 보고 나왔을 때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극이다. 물론 생각에 잠긴다고해서 어느 것 하나 해결되는 건 없겠지만, 고민은 멈출 수가 없다. 이 것 역시도 어쩔 수 없는 매일의 순환 중 하나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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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공연 소개
 

1890년 4월, 자신의 문학적 이름이 막 세상에 알려지기 시점에 안톤 체홉은 모든 문학 활동을 접어둔 채 유형지인 사할린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3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사할린 섬에 도착한 체홉은 유형지의 실태를 상세하게 시찰한 후 8개월 뒤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해 사할린에서의 조사 활동에 대한 보고서인 <사할린 섬>을 집필한다.

이 여행 이후 체호프의 작품들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적인 연민과 우수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초기작들과 다르지 않으나, 희극적인 요소들은 점점 줄어들고,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서 사회적인 문제나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극은 안톤 체홉이 사할린 섬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 발표한 단편소설 <공포>를 바탕으로 소설 속 화자인 ‘나’를 ‘안톤 체홉’이라 설정하여 희곡으로 새롭게 구성한 작품이다.

<공포>의 등장인물 모두는 삶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두렵고 진부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의 행동 때문에 현재에 고통 받고 있지만,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과거의 행동에 아직도 취해 있다. 이 삶을 끝내는 방법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다. 체홉의 말대로 “삶이 생활의 고통에 대한 보답으로 끝나거나 오페라처럼 갈채를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똑같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당장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과 삶의 본질에 대한 연극적 탐구가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으로 무대 위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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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기획의도

 
작가 고재귀가 이 극을 쓰게 된 이유는 근대적 인간에 대한 재조명을 위해서다.
 
19세기말, 20세기 초 러시아의 지식인이 보여주는 솔직한 인간성은 삭막하게 개체화된 21세기 대한민국의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가난하고 낮은 자들에게 보여주는 깊은 동정과, 욕망을 바라보는 차디찬 이성, 그 욕망을 어찌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연약함.. 이들이야말로 진실치 못한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근대적 인간의 모습이며, 19세기말 러시아와 21세기 초 우리 사이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져야 할 인간성에 대한 진솔한 물음과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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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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