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쌓이지 않는 시간, 지나지 않는 오늘

글 입력 2018.05.1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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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본 사람은 별로 없어도 제목만큼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 연극을 드디어 보고 왔다. 희곡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불리는 작품이자 부조리극의 대표작, 제목부터 고도를 기다리건만 끝까지 고도가 등장하기는커녕 그의 정체도 안 밝혀지는 연극, 도대체 종잡을 수 없이 난해하기로 유명한 연극,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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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러 가기 전에 주변의 평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작품이었다. 오히려 재미있게 봤다. 부조리극이라고 하지만 예상 외로 꽤 조리 있는 연극이었다. 또 초중반부까지는 흡사 블랙코미디 같은 연출에 정말 유쾌하고 웃긴 개그가 끊임없이 나와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인물들의 찰떡같은 연기 또한 웃음을 자아내는 데 한몫 했다. 무엇보다 의미도 맥락도 없는 대사만 이어지는데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본과 연출의 훌륭함을 느낄 수 있었다. 3시간이라는 러닝 타임이 주는 피곤함만 빼면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고, 또 왜 이 작품이 희곡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하는지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어떤 메시지나 의미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보여주기’만 하는 연극이기에, 이를 보고나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는 철저히 관객의 자유일 것이다. 그만큼 천차만별의 해석이 나올 수 있고, 심지어 해석을 하면 안 된다는 해석까지 가능할 것이다. 나 역시 이 연극을 보기 전에는 부조리극인 만큼 조리 있는 해석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막상 극을 보고 나서는 아주 흥미로운 생각거리 하나를 얻을 수 있었는데, 바로 시간이다.



사라진 시간


연극은 총 이틀의 시간을 다룬다. 당연히 첫째 날이나 둘째 날이나 모두 난해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맥락 없는 대화가 하루 뿐이면 그럭저럭 견딜 만한데, 똑같은 헛소리를 한 번 더 반복해서 들어야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준다(그런 줄 알고 중간에 쉬는 시간도 주었나보다). 물론 첫째 날과 둘째 날의 대사나 상황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지만,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은 두 날 다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이 연극은 왜 이틀씩이나 넣어놓아서 관객을 괴롭히는 것일까? 단순히 부조리함과 의미 없음이 나날이 심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 이목을 끌었던 점은 이 연극의 이틀이 어제와 오늘 혹은 오늘과 내일이 아니라 오늘과 오늘이라는 것이었다. 둘째 날의 인물들은 첫째 날을 잊는다. 전날 한 말도 잊고, 전날 있었던 일도 잊는다. 그나마 우리 상식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블라디미르(디디)만이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과의 차이를 알아내지만, 나머지 인물들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어제를 망각하는 바람에 디디도 헷갈려한다. 분명 어제 만났고 서로 얘기까지 나눈 사람인데 오늘 나를 처음 봤다고 하고, 분명 어제는 없던 꽃이 오늘 피었는데 원래부터 피어있었다는 식이다. 디디가 어제 있었던 일을 아무리 상기해줘도 사람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들은 어제만 잊은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자체를 망각한 것이다. 시간은 망각되면 더 이상 흐르지 않고, 흐르지 않는 순간 시간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 연극에 시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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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재


둘째 날 포조는 눈이 멀어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어제만 해도 눈이 잘 보이고 말 잘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오늘 장님과 벙어리가 된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디디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냐고 묻자 포조는 되려 화를 낸다.


포  조 저 놈(럭키)은 벙어리인걸.
블라디미르 벙어리라니!
포  조 그렇다니까. 신음 소리 한마디 못낸다오.
블라디미르 벙어리라! 언제부터 그렇소?

포  조
(별안간 화를 내며) 그 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못살게 굴지 좀 말아요! 언제 언제 해대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되는 거지.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 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것이오.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냐 말이오?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면, 오직 현재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우리는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기억이나 기대를 실제로 존재하는 지금과 비교하여 찾아낸 차이를 두고 변화나 시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과거, 즉 ‘있었던 것’은 엄밀히 말하면 없는 것이다. 매 순간만이 영원한 찰나로 존재할 뿐이다. 변화나 시간이란 건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지금 내가 겪는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허상의 개념에 불과하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는 역으로 모든 것이 영원하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의 폭 : 존재의 조건


그러나 이 연극의 영원한 현재는 흔히 말하는 ‘carpe diem(오늘을 잡아라)’이나 현재에 충실하라는 지혜라기보다는, 차라리 깊은 수렁이나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과 같다.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디디만큼은 영원한 현재에 깊은 절망을 느낀다.


블라디미르 너 나 모르겠니?
소  년 모르겠어요.
블라디미르 너 어저께도 왔었지?
소  년 아니요.
블라디미르 그럼 처음 오는 거냐?
소  년 네.
(…)
소  년 고도씨에게 가서 뭐라고 할까요?
블라디미르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나를 만났다고 말해라. 그냥 나를 만났다고만 해. 틀림없이 넌 나를 만난 거다. 내일이 되면 또 나를 만난 일이 없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


이들은 하루를 기점으로 서로를 잊고 서로에게 잊힌다. 하루가 시작하면서 존재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세계에 사는 이들은 오직 무한히 많은 ‘오늘들’ 속에서 불연속적으로 존재한다. 그만큼 좁은 시간에 놓인 그들의 존재는 위태롭다.

과거와 미래에 휘둘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인간은 과거와 미래 없이는 온전한 존재일 수 없다. 과거의 경험은 완전히 증발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역시 지금의 나만큼 나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기 마련이고, 당장 내일이나 조금 후의 일조차 계획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최소한의 기억이 있고 욕구와 의지가 있는 한 - 그것이 굳이 먼 과거나 먼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어도 - 나의 존재는 반드시 ‘지금’을 넘어서게 된다. 즉 인간의 존재는 찰나의 순간만이 아닌 일정 정도의 시간폭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극 중 인물들은 절망적으로 순수하게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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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수수께끼 모음집 같은 연극이다. 오지 않는 고도부터가 그렇고, 고도를 기다리는 과정을 채우는 말이며 행동이 모두 수수께끼이다. 관객의 머릿속에는 생각과 생각의 좌절이 계속 교차된다. 심오한 상징같이 느껴져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을 해보려 시도하지만, 그러한 시도를 좌절시키는 끝없는 부조리 앞에 이내 모든 게 의미 없다고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좋았던 연극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함부로 추천해주었다가는 한 소리 들을까봐 망설여진다. 그냥, 요즘 사는 게 너무 당연해서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사람, 과도한 집중과 생각으로 지쳐보고 싶은 사람, 아니면 그냥 밑도 끝도 없는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시도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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