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북마크] 무대여,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렴

뮤지컬 < 레드북 >과 뮤지컬계 여성 서사
글 입력 2018.05.1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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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1 침묵을 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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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페미니즘 뮤지컬 <모던 걸 백년사> 서승연 연출가 인터뷰

[Opinion] 뮤지컬 <레드북>과 여성 서사




Like, Dislike 여성 캐릭터

 
뮤지컬 관객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성 캐릭터와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는 공교롭게도 모두 ‘안나’다. (출처 : 공연 포털사이트 스테이지톡 설문) 전자는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의 안나, 후자는 뮤지컬 <레드북>의 안나.

싫어하는 안나부터 살펴볼까. 따지고 보면 안나에겐 잘못이 없다. 안나가 살인을 하길 했나, 계략을 꾸며 주인공을 괴롭히길 했나. <블랙메리포핀스>의 안나는 독일이 자행한 생체실험으로 인해 성적 학대를 당하는 인물이다. 즉, 철저한 피해자다. 그런데 왜 ‘싫어할까’? 이쯤에서 수사에 관해 필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때의 ‘싫어하는’은 캐릭터에 대한 반감이 아닌 창작진에 대한 분노라는 것. 이 싫음은 ‘왜 이렇게밖에 못 썼어?’라는 성남의 표출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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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이유는 다음 설문인 ‘여성 캐릭터가 불편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남성 캐릭터의 성장 또는 각성의 도구로 이용될 때, 신체적·성적 학대를 당할 때, 성적 매력만 부각될 때, 단순한 캐릭터를 착하고 예쁘게 포장할 때. 위와 같을 경우, 관객들은 여성 캐릭터를 보고 불편함을 느낀다. 최근 올랐던 공연만 해도, 이 불편함에서 자유로운 뮤지컬은 몇 없다. 에드거 앨런 포를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엘마이라와 버지니아, 총사에게 버림받은 밀라디와 구원받는 콘스탄스, 성적 학대를 당하는 좌절을 이겨내고 창녀에서 성녀로 규정되는 알돈자 등. 관객들이 Dislike하는 여성 캐릭터의 형상은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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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자, 표현법을 바꿔보겠다 공언하는 프로덕션도 종종 있으나 바뀐 표현 속에서도 여전한 건 여전하더라. 몇몇 대사와 표현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무대 위 여성 캐릭터가 헤쳐 나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GOOD 누드, BAD 누드


구닥다리는 왜 구닥다리일까. Dislike는 왜 Dislike일까. 말하기도 입 아픈 자명한 답이지만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자. 근본적인 문제는 남성 캐릭터가 주체임에 반해 여성 캐릭터는 대상이라는 것에 있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많다. 남성 캐릭터는 구구절절한 서사로 중무장했기에 면죄부도 변명거리도 왕왕 있다. '작품의 주제를 위해선 어쩔 수 없어'라는 식의 작은 눈 감음은 남성 서사를 지탱해왔고, 여성 캐릭터를 도구화하는 데 일조했다. 어쩌면 눈을 감아야 할 필요성조차 못 느껴 왔을 수도 있다.

게으름을 가린 서사의 껍질을 벗겨내고 탐침을 찔러넣기 위해, 회화 속 여성의 모습부터 살펴보려 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시각 재현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그중 여성의 신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누드화는 보다 투명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텍스트다. 이때, 흥미로운 건 여성의 누드를 향한 두 가지 시선이다. 두 점의 누드화를 대하는 대중의 반응은 여성의 신체를 소비해온 대중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그리고 이는 현재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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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엔 두 점의 누드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하나는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다. 여성을 피사체로 한 누드화는 19세기에 이르러 두 가지 양상으로 나뉘게 되는데 카바넬과 마네의 누드화가 두 양상의 대표주자다.

<비너스의 탄생>은 누드화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을 가져와 남성 작가의 고정관념과 욕망을 투영시킨 신체. 카바넬의 비너스는 그렇다. 에밀 졸라가 비판했듯 "젖의 강에 빠진 이 여신은 맛있어 보이는 고급 창녀와 닮았다. 그녀는 살과 뼈로 만들어지지 않고(만일 그랬다면 보기에 안 좋았을 것이다.) 주로 분홍색과 흰색으로 되어 있으며 케이크 위에 부드러운 장식으로 사용되는 마지르팡(marzipan) 종류로 만들어진 듯하다." 카바넬은 자신의 욕망과 응시하는 자의 욕망이 투영된 여성의 신체를 그려 전시해놓았고, 여신의 신성성과 은밀한 에로티시즘이 결합한 이 작품은 평단의 호평과 나폴레옹 3세의 구매까지 이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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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흥미롭게도 마네의 <올랭피아>엔 맹비난이 퍼부어졌다. "미술사에서 <올랭피아>만큼 사람들의 비웃음과 야유를 산 작품은 없었다."는 루이 오브리의 말처럼, <올랭피아>는 당시 대중에게 불편하고 파격적인 작품이었음이 분명하다. 마네는 누드의 전통 미학을 깨고 누드화의 피사체로 창녀를 내세웠다. 예상컨대 대중을 가장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수줍음과 결여가 없는 여성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올랭피아>의 여성은 음식 같지 않다. 남성을 유혹하는 부드러운 붓 터치도 부끄러운 듯 돌린 시선도 없다. 이 피사체는 도리어 그림 밖의 누군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응시받기 위해 고안된 여성’이 아니라 도리어 ‘응시하는 자를 응시하는 여성’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의 비난에도 <올랭피아>는 '정물화로서의 여성'에 저항한 근대성의 선두주자로 재평가 받았으며, 작품을 향한 공분을 통해 우린 '응시하기 위한 여성성'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올랭피아>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아마 기억들 하실 거다. 2017년 대한민국에 이르러 <올랭피아>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얼굴이 합성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인격 모독이라 말했으나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근대성의 선두주자 <올랭피아>에 '전근대로의 회귀'의 대표 격인 박 전 대통령을 합성시킨 것은 일부 사람들이 <올랭피아>의 신체를, 그리고 여성의 누드를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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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같은 19세기. 근대성의 신호탄과 함께 팜므파탈을 향한 경고장 역시 수신된다. 고대엔 괴물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메두사는 점차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관객이 ‘감히 응시하지 못하는’ 아름답고 강인한 여성은 괴물로 표찰되어 신체를 훼손당하기에 이른다. 메두사에 관한 상상력도 19세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 콘돌리자 라이스 등 우리 시대의 권력 있는 여성들은 메두사 머리에 합성되어 인터넷상에 유통되었다. 응시할 수 있는 여성, 응시하지 못하는 여성, 그리고 응시하지 못하는 여성의 신체를 향한 새로운 맥락. 회화 속 여성에선 이런 인식의 단면을 읽어낼 수 있다.

 
 
야한 소설을 쓰는 여자

 
사실 뮤지컬 속 여성들은 ‘응시할 수 있는 여성’에 가깝다. 서사의 맥락이 입혀지고 이들은 하나의 기표로서 기능하게 된다. 남성 주인공만 사랑하는 지고지순함, 남성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이용되는 ‘성적 폭력’, ‘고난’, ‘외도’. 그 와중에서 그들은 버림받거나 구원받거나 추앙받는다. 누구 말마따나 오필리아 없는 햄릿의 이야기는 가능하지만, 햄릿 없이는 오필리아 이야기가 불가능한 서사의 향연이다. 이에 대한 관객들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왔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관객들의 인식이 작품을 제치기 시작한다. '싫어한다'는 의사가 담긴 설문만 봐도 얼마나 넌더리가 났는지 짐작할 만하다. 다시 설문으로 돌아가 보자. 2017년의 관객들은 뮤지컬 <레드북>에 환호를 보냈다. <레드북>은 2017년 공연계 내 화제의 중심이었으며, 2018년 초연도 좋은 반응으로 마무리했다. 특히, 주인공 안나는 관객의 사랑을 받았으며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로 우뚝 섰다. 다시 말해 그는 ‘잘 쓰인 캐릭터’란 호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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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담 안나는 무엇이 다를까. 안나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인물도 아니고, 거창한 모티브가 있는 인물도 아니다. 단지 그는 자신이 누굴까 고민하다가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쓰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인물이다. 극작으로서도 예상 가능한 구성이다. 그런데도 이 캐릭터와 이야기는 낡지 않았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야한 소설을 쓰며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여자의 이야기는 통탄스럽게도 새롭다.
 
19세기 화폭 속 비너스는 '응시되는 여성'으로 올랭피아는 '응시하는 자를 응시하는 여성'으로 담긴다. 그리고 같은 19세기 안나는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재현되고 담기는 것을 거부한 채, 스스로 저자의 자리에 오른다. 안나에 이르러 대상으로서 응시되던 여성 캐릭터는 권위(authority)를 지닌 저자(author)로 거듭난다. 자신과 자신 주변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할 수 있는 위치를 점유하게 된 것이다.

안나를 비롯한 여인들이 글을 쓰는 행위는 관습에 부딪치는 저항이며 자신의 생애를 위로하는 방법이다. 19세기 영국 사회는 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 손가락질하지만, 글을 쓰는 여성들은 제 감정에 충실하고 욕망에 솔직해진다. 중요한 건 그들의 신체가 느끼는 감각이고 그들의 가치관이며 그들의 생애다. <레드북>은 저자의 권위를 가지게 된 여성들이 어떻게 규범을 무너뜨리고 보수성의 돌파구를 찾는지를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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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 안나는 끝까지 스스로의 권위를 지켜나간다. 안나에게 권위란 곧 존엄이다. 자신을 구속하려는 남자에겐 화를 낼 줄 알고 성적 폭력을 일삼으려는 남자에겐 발차기를 날릴 줄 안다. 안나의 행위는 보수적 여성성에 대한 저항이고 신체의 해방이며 곧 인간의 자유다. 여성성이 기표화된 세계에서 안나는 제 언어를 정 삼아 세계의 기표를 뚫는다. 여성이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는 사회,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이혼하는 것도 불가했던 사회, 여성이 글을 쓰는 게 이상했던 사회. 안나의 발칙한 상상력은 그 사회에 조그만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시대의 보수성은 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올랭피아>에 퍼부어진 맹비난처럼 안나에게도 음탕하고 천박한 여자라는 손가락질이 따른다. 심지어 안나의 출판물 '레드북'으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고 추방당할 위기에까지 처한다. 안나를 사랑하는 브라운은 안나에게 '정신 이상'이라는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해보자고 제안하지만, 안나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가치관과 자신의 독자를 포기하지 않는다.





문제투성이 세상에 하나의 오답으로 남은 안나는 '나는 나로서 행복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재판에 임한다. '난 뭐지?’라고 자문했던 안나가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답을 찾는 여정. <레드북>은 어느 인덱스에도 속하지 않던 안나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는 여정을 서사화한다. 이는 직접적이기에 유의미하고, 정조준이기에 가슴 뭉클한 여성 서사다.
 
 
 
안나, 이야기를 들려주렴

 
다름은 이상함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자는 것. 우리 모두 제1의 자기 자신이 되자는 것. 너무 당연해서 재차 얘기할 필요도 없는 명제들은 <레드북>을 통해 여성 서사로 공명한다. 많은 뮤지컬은 정의를 위해 고뇌하는 남성, 터부시된 사랑을 하는 남성, 여성의 의복을 즐겨 입는 남성을 통해 인간의 정의와 개성과 존엄을 노래해 왔다. 이들의 성취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성 인물의 여성 서사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창작 뮤지컬의 경우 더 그렇다. 정의를, 개성을, 사랑을, 존엄을 여성 서사로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건만, 무대 위 여성에겐 박하디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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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를 필두로 제 목소리를 가진 여성 캐릭터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퍽 희망적이다. <레드북>의 성취는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안나는 이런 이야기가 사랑받는 시대라는 것을 분명히 일러 주었다. 안나를 만나게 된 관객은 앞으로 게으른 젠더 의식을 가진 창작진을 향해선 ‘싫어한다’며 가감 없는 비판을 보낼 것이며, 시대의 인식을 담지한 창작진을 향해선 ‘좋아한다’며 아낌없는 칭찬을 보낼 것이다. 그래서 <레드북>은 작품 속 런던 대중에게도 작품 밖 한국 대중에게도 참 뜻 깊은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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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이야기를 들려주렴.’ 작가 안나의 시작은 노인 바이올렛의 목소리에서부터였다. 남편과 사별한 채 정숙을 지키며 살아오던 노인 바이올렛은 안나의 첫 번째 독자였고 안나에게 글을 쓸 용기를 주었다. 바이올렛이 안나의 이야기를 원했듯, 우린 우리의 욕망을 확인시켜줄, 우리의 삶을 보여줄,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줄 여성 캐릭터를 원한다. 안나는 이 원함의 첫 시류를 탄 여성 캐릭터의 상징적인 얼굴이며, 이 시류 속에서 주체적인 여성 서사를 무대화한 창작진의 얼굴이다.
 
그러니 안나, 불편한 세상을 뚫고 마음껏 지껄여주렴,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주렴. ‘존슨’들의 세상에 통쾌한 발차기를 날려주렴.
 
 
안나, 이야기를 들려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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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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