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개 입자 속의 공포와 구원 가능성, 연극 공포

글 입력 2018.05.1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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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안개 입자 속의 공포와 구원 가능성
연극 <공포>


 연극 <공포>는 체호프 단편 중 하나인 <공포>와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무엇이 더 좋았느냐를 논할 능력이 나에겐 없다. 하지만 두 작품은 나에게 분명 뚜렷히 다른 감상을 안겨주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내가 읽은 작품이 맞는가를 고민했고, 연극을 보고 나온 지금은 더욱 두 작품이 정말 같은 작품인지도 모호하다. 그런 점에서 연극 <공포>는 체호프 소설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은 새로운 작품이다. 좋은 작품을 새로운 해석을 통해 풍부한 메시지를 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연극 <공포>는 훌륭한 연극이었고, 인간의 근원과 구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돕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리뷰를 쓰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 리뷰는 이런 식으로 쭉 진행하려 한다.

 우선 단편소설 <공포>는 전염병 같은 느낌을 줬다. 신길의 공포가 서술자인 '나'에게 전달되고, 최종적으로 독자인 나에게 전달되었다 신길 말대로 삶의 공포야말로 미지에 쌓인 어떤 공포적 존재보다 끔찍하다. 그것은 어려운 안개 속을 떠도는 전염병의 입자같아서, 멀쩡하게 숨쉬고 움직여도 알게 모르게 우리의 내장을 파먹는다. 연극 <공포>는 소설에서 느낀 공포감에 더해 인간의 몸부림을 녹여냈다. 소설이 정적인 충격을 주었다면, 연극은 거기에 격렬한 움직임을 더했다고 해야할까. 소설의 주인공과 그 외 인물들이 안개 속에 떠도는 공포에 몸서리쳤다면, 연극 <공포>는 그 몸짓을 수면 위로 뚜렷히 떠올린다.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해서 연극 <공포>가 단편소설 <공포>와 전혀 다른 결말로 내딛은 것은 아니다. 두 <공포>의 끝은 같다. 신길이 마리아와 주인공의 불륜을 보고 신길은 모자와 신발을 가지러 돌아와 다시 나가고(두 작품이 다른 사물을 떠나는 신길의 손에 쥐어주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브류쉬카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신길은 퇴장하면서 기이한 냄새를 맡고 토를 하는데, 이는 공포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그가 공포를 마주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공포> 모두 삶의 공포를 직면한다는 다소 음울해 보이는 결말로 막을 내렸지만, 나는 사실 연극 <공포> 쪽이 좀 더 이 끔찍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느낀다. 연극 <공포>에는 그런 공포스러운 삶에도 유지되는 '선의 의지'ㅡ 혹은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소설 속에서는 아무런 겁이 없었던 가브류쉬카가 한 병을 까쟈와 입맞춤한 곳에 묻어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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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신길이라는 인물을 제외하고서는 이야기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진부하게 반복하고 있는 일상 속에서 삶의 불가해성에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그가 불륜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지 않는 것도 그의 불행이 인간의 근본적인 부분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길과 비슷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인물이 있으니, 안톤 체홉이다. 필자는 그가 친구의 부인을 사랑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인간의 죄악과 구원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참한 세상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고뇌와 한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이나, 가난한 의사에서 성공한 극작가가 된 압박감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연극은 그가 자살하려다 관두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죽음을 선택하는 대신, 사할린으로 여행을 가고 신길의 집에 들리는 선택을 했다. 그 모든 이면에는 구원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 마리가 뒤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요제프 신부에게 애걸복걸하는 체홉의 고민을 잘 녹여내고 있다. 그는 마리가 깨우러 오는 모든 순간 요제프 신부에게 지른 비명을 반복한다.
 
 체홉의 고민이야말로 단편 <공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연극 <공포>의 새로운 해석이다. 체홉의 고민은 후에 가브류쉬카의 내기까지 이어진다. 체홉은 사할린의 눈먼 신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명을 지른다. 인간의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삶 앞에서 신이 무엇을 하느냐 묻고, 신부에게 답을 요구한다. 뻔하다면 뻔한 대답을 할 수 있을 신부는, 체홉의 기대와는 다르게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사할린에서는 죄없는 죄가 죄를 고백하고 매를 맞는다. 신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죄없는 자에게 죄를 고백하라 이야기하는 것 뿐이었다. 이어지는 요제프 신부의 말에서는 실존주의와 비슷한 색을 띈다. 그는 신을 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인간을 직접 구원해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신은 자신을 만끽하고 있으며', 죄 없는 인간들의 죄를 고민하면서, '선은 필사의 의지'라고 말한다.

 우리는 신의 의지로 만들었지만, 내던져졌다. 낙원에서 선악과를 먹는 것이 신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선악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인간이 만든 세계는 혼돈에 가득 차 있다. 사할린에서 그토록 끔찍한 처벌이 사회의 '정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졌던 것처럼, 인간의 세상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제프 신부는 '선'이 밖이 아니라 필사의 의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신을 섬기는 신부의 입장을 고려했을 때, 그가 여전히 신이 우리에게 준 자유의지의 구원 가능성을 믿었다고 해석한다. 인간은 느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재앙인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시험받는다. 신은 인간을 내던졌지만, 구원한다. 40인의 순교자들이 모두 동시에 하늘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이교도인이 순교하지 못한 사람에게 기도를 하고 개종함으로서 40명이 채워졌다. 신은, 의지를 가진 인간을 구원한다. 가브류쉬카는 그런 맥락에서 구원받을 가능성을 갖는다. 모든 것이 망가졌지만, 그는 까쟈를 위해 필사의 의지로 술을 참았고, 마지막 순간 까쟈를 위해 마지막 한병을 묻어두었다. 그는 여전히 한심한 작자지만, 필사의 의지를 가진, 선의를 가진 인간이다.

 요제프 신부의 말처럼, 인간은 불완전하고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 연약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서 다짐한 인간의 의지는 구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너무 작고 연약하다. 체홉은 결국 마리아와 몸을 섞고, 신길에게는 다시 삶의 공포가 찾아온다. 가브류쉬카가 그랬듯이, 그것은 한 인간이 견뎌내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신길은 가브류쉬카를 시험하려 들었지만, 사실 그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그가 이겨내길 바란 것처럼 보인다. 결국 모든 것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흘러가고, 체홉과 신길은 끔찍한 밤인사를 나눠야 했다. 신길은 체홉에게 삶을 이해했다면 축하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체홉의 눈 앞도 신길처럼 컴컴했을 것이다.

 나에게 연극 <공포>는 삶의 불가해성과 인간의 실존, 그런 끔찍한 삶인데도 불구하고 선의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들로 기억될 것 같다. 인간의 한계를 다뤘지만, 삶을 결코 공포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는 연극의 방식이 강렬했다. 이토록 연약한 인간들에게 삶은 무엇이고 공포는 무엇이길래 이렇게 막강하고,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하는가. 신길이 맡았던 고약한 냄새가 내 코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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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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