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인생,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극단 산울림, '고도를 기다리며'
글 입력 2018.05.1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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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펼쳐지는 소극장 산울림의 무대는, 중앙에 바위, 그리고 기이한 모양새로 꺾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심플한 구조다. 소극장답게 객석의 규모도 작았고, 무대와 매우 가까워 배우들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다. 한참을 나무 앞에서 보낸 것처럼 보이는 에스트라공(박상종)과 블라디미르(김정호)가 실없는 대화를 나눈다. 둘은 오랜 친구처럼 보인다. 중후한 나이대와 꾀죄죄한 차림새는 비슷하지만, 둘의 캐릭터는 조금 다르다. 에스트라공은 장난기가 많고 말도 많으며, 욱하는 성질도 있는 것 같다. 반면 블라디미르는 좀더 진중하고 침착해서 에스트라공을 잘 챙겨준다.

 두 주연배우가 각자의 성격을 맛깔나게 살리면서 대화를 나누고 슬랩스틱 코미디를 펼칠 동안, 관객은 극에 빠져들고 ‘뒤에 무언가가 나올 것만 같은’ 기대감을 느낀다. 특히 포조(이호성)와 럭키(박윤석)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더욱 그렇다. 근엄해보이려 하지만 어딘지 어색해서 귀여운 풍채 좋은 할아버지 포조와, 그가 목줄로 묶고 다니는 앙상하고 맥이 빠진 듯한 럭키는 한껏 궁금증을 자아낸다. 포조는 왜 럭키를 목줄로 매달고 다닐까? 럭키는 왜 한 마디도 하지 않을까? 둘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고, 무슨 관계일까? “저 자는 왜 짐을 내려놓지 않는거죠?”라는 에스트라공의 질문은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지만, 그는 절대 시원한 답변을 얻을 수가 없다.

 수수께끼 같은 말과 행동만 늘어놓던 포조와 럭키가 퇴장하면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저녁이 되고, 한 소년(이민준)이 나타나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말을 전해주고 간다. 밤이 되고,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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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1부를 관람했을 때까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장면들을 보면서 2부에서는 이 수수께끼들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모두 처음보는 장면이었기에 신선했고, 배우들의 대사가 핑퐁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어서 몰입해서 봤던 것 같다. 그러나 곧이어 진행된 2부는 이 연극에 대한 첫인상과 기대감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다시 아침이 되고, 무대와 배우들에게는 변함이 없지만 중앙에 서있던 나무에 작은 잎사귀가 달렸다. 이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블라디미르 뿐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에스트라공은 바로 전날 있었던 일들을 가물가물해 하고, 그 장소에 나무가 있었는지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든 장면들이 1부에서 있었던 일들의 변주일 뿐이다. 포조와 럭키가 등장했다 퇴장하고, 소년이 찾아와 ‘고도는 내일 꼭 오겠다고 한다’는 말을 전하고 사라진다. 소년 역시 전날 자신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과연 블라디미르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기억을 갑자기 상실해버린 것인지, 아니면 블라디미르가 꿈을 꾼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전날의 사건을 증명해주는 소품들이 무대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꿈은 아니다. 그렇다면 현실인가? 혹은 1, 2부 모두 누군가의 공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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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이제 그만 가자.” “안돼,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비슷한 대사와 비슷한 상황이 두 번째로 반복될 동안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끼고, 배우들도 마찬가지로 권태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1부에서의 에너지와 긴장감은 점점 느슨해지고 대사는 점점 느려진다. 급기야는 배우들이 무대에 드러누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기도 한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극장의 적막. 의자에 앉은 허리는 뻐근해지고, 잠도 조금 오는 것 같고, 마음도 무거워진다.

 2부의 마지막에서 배우들의 얼굴은 처음보다 몇 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고도를 기다리며 이젠 할 일도 더는 없다. 완전히 지쳐버린 그들은 나무에 목이라도 매려 하지만 목을 맬 줄조차 없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어쩌면 올 수도 있고. 그때가 언제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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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은 인생의 모습을 본뜬 것이지만, 사실 연극만큼 재미난 인생은 없다. 갈등이 있고, 갈등이 해소되고, 결말로 이어지는 극은 너무도 흥미진진하고 깔끔해서 보는 이에게 쾌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인생은 오히려 이 이상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와 많이 닮았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 대단한 일이 다가올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일매일이 그 전날의 반복일 뿐이고, 어느 것도 말끔히 해결되는 것 없이 그저 두루뭉실 덮어진다. 인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그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처럼 자연스레 저물어갈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기대하는 것일까?

 이 극의 작가와 연출진이 노련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 누구도 인생이 어떻고 하는 설교를 늘어놓지 않았지만 관객은 자연스레 인생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품고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고도를 수십 년간 기다리며 늙어버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인생은 헛된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닐까. 2부 끝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1부와 2부의 내용이 어땠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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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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