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신발을 벗고 모자를 들춰, 고도를 기다리며

글 입력 2018.05.1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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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신발을 벗고 모자를 들춰
고도를 기다리며


필자가 생각했을 때 인간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 중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행동은, 명확한 자기인식이다. 자신을 거울에 비추는 것은 자신의 심연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선택권 없이 그저 '발생'하고 세상에 이유없이 유기되어 버린 우리의 존재에는 항상 허무함과 불안의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누구도 손쉽게 죽음을 택하지 않는다. 신은 무책임하게 우리를 만들어 내던졌지만, 그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는 신은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삶에서는 '죽었다'. 인간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삶에서 무엇이든 채워가려고 몸부림친다.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무언가 행해야 하고, 삶을 유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행동의 의무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에 꼿꼿히 선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의해 그 자신을 정의하고 창조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정의한다.

하지만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무언가 행하지 않으며 안되며, 이러한 행동의 의무ㅡ 벗어나는 것은 삶을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의해 그 자신을 정의하고 창조하며, 그 세계를 정의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기다리는 인간이다. 이 '기다림'이야 말로 연극의 가장 큰 줄기다. 사실 이들에게 그것외에 선택지가 별달리 있는 것은 아니다. 기다림은 수많은 시련으로 가득 차 있다. 기다림의 과정에서 포조와 럭키는 재물을 잃고, 시력을 잃고 벙어리가 된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자살까지 생각하며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에게 자리를 뜨자고 종용하지만, 그들은 자리를 뜬 사이에 고도가 올까 나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기다림에 끝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블라디미르가 울상이 된 채로 부른 노래에서, 배고파서 주방에서 음식을 훔쳐먹은 개는 요리사에게 맞아 죽고 다른 개들이 그를 묻어줬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노래가 이어진다. 그들의 기다림도 노랫말과 같다. 블라디미르가 노래를 부르면서 이리저리 사람이 없는지 두리번거린 것처럼, 앞으로 그들이 기다리는 시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고도가 무엇을 상징하건, 이들은 기다린다. 에스트라공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도 가지 않아.끔찍한 일이야'라는 말처럼, 아무런 진전이 없는 기다림을 계속 이어나간다. 이들의 기다림은 삶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 삶이 무엇이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을 영위해간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지루하지만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늘 시간을 대면하고 견뎌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어떤 목적 부여 없이도 태어난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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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다림의 무의미성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꿰뚫는 중요한 부조리 중 하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극 초반에 블라디미르의 대사는 주의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두 도둑에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는 성 어거스틴의 "절망하지 말라, 두 도둑 중의 한명은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너무 기뻐하지도 마라, 두 도둑 중 다른 한명은 저주를 받았느니라" 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과 비교해  고도와 구원, 희망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삶의 불가해성을 표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구원은 결코 약속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기독교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흰 수염을 가지고, 양 치는 두 아이를 이끌며, 영문으로 godot라 쓰이는 고도는 분명 인격신을 떠올리게 한다. 흰 수염은 신의 초상으로 잘 묘사되며, 양을 치는 형제는 카인과 아벨을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강조해 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는 나무의 모양을 십자가로 하는 연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도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그의 형제가 매를 맞고 자신은 맞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고도라는 인물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삶에 있어서 고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디디와 고고가 기다리는 그가 누구였던 간, 그들의 기다림에는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는 결코 실존적 삶에 대한 비극성을 표현하는 연극이 아니었다. 끝없는 기다림은 끔찍하게 느껴지지만, 두 인물의 기다림의 방식은 관객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부분이 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칭성을 이야기하면 지면이 모자라니, 필자는 블라디미르의 특징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하려한다.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을 돌보는 모성적 존재로 묘사된다. 그는 에스트라공을 먹이고 보살핀다. 그는 동시에 구원과 행복을 고민하는 존재다. 에스트라공이 땅에 걸터앉아 조는 동안, 블라디미르는 성경 구절과 나무를 유심히 살핀다. 나무는 희망의 상징이다. 그에게 고도가 약속한 유일한 것이기에, 블라디미르는 나무의 주위를 맴돌며 그 종류와 변화를 알아차린다. 나무는 자살할 끈을 지탱하기도 어려울 만큼 연약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싹이 나는 등 미미한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블라디미르는 그 변화를 기뻐한다. 고도는 '오늘'오지 않으므로,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폐허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는 고도가 주어줄 따뜻한 잠자리를 상상한다. 사실 고도가 그것을 정말 주어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어쨌든 기다린다. 죽을 수도 없고, 희망이 사라지지도 않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다. 무언가를 절실히 기다리지만, 소망이 반드시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약속되지 않았고, 미래를 바라볼 수 밖에 우리에게 놓여진 과거와 현재는 폐허 뿐이다. 우리는 삶을 견뎌내기 위해 발을 옥죄는 신발을 벗어보기도 하고, 끝없이 자신의 사고를 확인하듯 모자를 두드려본다. 그것은 허무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나침반은 희망을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이것이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이고, 가장 위대한 점이다. 인간은 존재하려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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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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